◆◆아테네와 이스탄불에서 버스를 타고 (아테네,고린도,이스탄불) 2005-07-2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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ꁰ 10일간의 여행


제 1일. 서울에서 이스탄불로

   

출발 전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남편과 작은 아이에게 “이제 안녕~”하니, 아침부터도 표정관리가 잘 안되던 작은 아이의 낯빛이 이젠 아주 안 좋아져서 조금만 더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 됩니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손 흔들며 돌아서니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합니다. 열흘간일 뿐인데 왜 이리도 애달픈지......

 출국 수속을 밟고 나니 큰 아이가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한다며 채근합니다. 터키에 가서 사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그 친구가 터키 물건은 절대 싫다 했고 ‘면세점에서 산 긴 팔 원숭이 인형’으로 하라고 지정을 해주었답니다. ‘에휴~ 요즘 아이들이란......’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우리 어릴 때에 비해 해외 나들이가 잦다 보니 면세점 물건이 고가, 고품질이라는 것도 알고, 또 아이들 생각에 미제, 일제가 아닌 터키제는 좀 후진 물건으로 생각되었나 봅니다. 하기야 터키는 1차 산업과 3차 산업에 비해 2차 산업의 발달이 미진한 편이므로 아이들의 선입견이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비행기 안에서     

터키 항공(TK) 비행기에 올라 앉아 있으려니 영어, 일본어, 터키어 순서대로 기내 안내 방송이 흘러나옵니다. 영어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으로서 영어권 국가가 아닌 나라로의 여행이 좀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제 마음이 우습기도 하면서 어차피 모르는 터키어가 한편으로는 참 편안~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에 갈 때는 잘 안되는 영어를 하고 있는 꿈을 밤새 꾸느라 진땀이 다 나곤 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스탄불에 도착한 첫 날 밤 그야말로 생판 모르는 터키어스러운 말로 계속 뭐라 뭐라 하는 꿈을 꾸긴 했습니다.

 언어가 다른 나라로의 여행이란 이렇게 근본적인 스트레스를 갖고 출발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이륙하는 동안 껌을 열심히 씹었는데도 귀가 한참동안 먹먹하다가 좀 뚫리는 듯 싶길래 여행 기간 동안 아이와 함께 읽기로 한 영어책인 레모니 스니켓의 ‘A Series of Unfourtunate Events’ 시리즈 중의 한 권을 펴들고 읽으려는데, 앞쪽의 형광등 중 하나가 계속 깜빡거려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데 그냥 참지 뭐 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점점 신경이 예민해지기만 합니다.

 마침 잘 생긴 스튜어드가 지나가길래 말도 걸어볼 겸 저 불 좀 꺼달라고 하니 

 “Impossible. One switch for left lights"라고 합니다.

 주어 동사 기타 등등 다 생략하고 꼭 필요한 단어들로 최적화된 영어입니다.

 물 달라고 할 때도 쓸데없이 혀를 굴려 ‘워러’라고 하는 것보다는 미국식도 아니고 영국식도 아니고 딱 한국식으로 ‘워터’라고 해야 더 편안하게 잘 알아듣습니다. 터키 항공 기내 승무원들에게 뿐만 아니라 아테네나 터키 관광지에서도 연음 잔뜩 들어간 미국식 영어보다는 차라리 broken english 인 콩글리쉬가 오히려 잘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하간에 이스탄불에 도착하기까지 12시간동안이나 조명등이 깜빡거릴 생각을 하니 좀 아득해지기도 해서, 깜빡거리는 저 등만 바꿔 달라 하니 기내에 여분의 등이 없다 하고, 점점 쓸데없는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한 저는 그럼 저 등만 빼달라고 했더니 난색을 표하며 잠시 사라졌다가 어느 틈엔가 슬쩍 와서 등을 빼갑니다.

 ‘이 한국 아줌마 정말 끈질기네’ 하고 투덜대지는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오후 3시 40분에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는, 동쪽으로 도는 지구 위를 서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이다 보니, 한참이나 책을 읽다가 창문 셔터 열어보기를 몇 차례나 하는 동안에도 창 밖은 여전히 밝기만 합니다. 

 창문 밖을 아예 잊었다가 문득 셔터를 열어보니 푸른빛이 도는 검은 하늘에 오리온자리가 장엄하게도 걸려 있습니다.


이스탄불에서의 첫 날 밤

 한없이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제 더 이상은 못 참을 것만 같아 온 몸을 뒤틀려는 참인데 잠시 후 착륙한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들립니다.

 창 밖 아래로 보이는 이스탄불의 밤은 활기차면서도 정겹고 그러면서도 어둠 속에 감춰진 신비스러움이 있을 법한 풍경이었습니다.

 터키가 사랑하는 터키의 영웅 ATATÜRK는 ‘ATATÜRK AIRPORT’ 라는 공항 현판에서도 위엄 있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번 터키 여행에서 가장 강력하게 인지된 인물이 바로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입니다. 터키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타튀르크의 초상화는 버스 운전사의 핸들 옆에서 차와 함께 흔들거리기도 하고, 호텔 프론트 벽면에 위엄 있게 걸려있기도 합니다.

 이 모든 아타튀르크의 초상화들이 박정희나 전두환의 그것과는 달리 터키인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그 곳들에 걸려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터키인들의 엄청난 사랑을 보여줍니다.

 터키인들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리의 역사 속 인물들 중 과연 그 누구를 한국의 아버지, 한국의 어머니라고 소개해야 할까요?

 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거리를 달려 예약된 호텔로 가는 길에 화려한 야간 조명등이 비춰진 술탄아흐메트 자미(내부의 신비스런 푸른 모자이크 장식으로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는 아주 장관이었습니다.

 중간에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아쉽게도 블루 모스크 내부의 신비로운 푸른 빛 모자이크는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여행 최대의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청소하느라 입장이 불가하다는 시간에 ‘제가 청소하면서 보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해볼까 하는 치기어린 생각도 얼핏 했을 정도로 블루 모스크를 못 본 아쉬움이 컸지만 ‘단체 여행’에서 이런 아쉬움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죽기 전에 꼭 터키를 보시고 싶으시다는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블루 모스크를 찾을 날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이스탄불을 떠나던 날 아침 버스 안에서 블루 모스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그 모습을 제 두 눈에 담아두었습니다.

 이국에서의 첫 날 밤을 묵게 된 호텔은(터키의 호텔들은 영어식으로 HOTEL로 표기된 곳들도 있고 터키어식으로 OTEL이라고 표기된 곳들도 있습니다.) 이후에 묵었던 호텔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호텔이었지만, 첫 날 밤을 지낸 호텔이기도 하고 이후 여행 일정 중 이틀 밤을 더 묵었던 호텔이었기에 나중에는 ‘고향’같은 친근감과 익숙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저 며칠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터키’도 이렇게 익숙하고 친근한 듯 느껴지겠지요? 제가 아이를 동반한데는 이렇듯 ‘세계에 대한 친숙함’이라는 것에도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시설이나 기타 서비스가 전반적으로 괜찮았던 반면 호텔 이미지를 다소 부정적으로 만들고 불쾌한 기억을 남기는, 그리고 그 이후 호텔들에서는 없었던 특이한 점은 ‘강제적 벨 보이 서비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행사측과 사전 계약된 부분인지, TC 가이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은근슬쩍 둘러치며 가방들을 한 줄로 세워놓게 하고 스티커들을 가방마다 붙여 놓고는 각 방 번호를 적더니 잠시 후 벨 보이가 방으로 가방을 가져다주며 당연한 듯 손을 내밉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아줌마도 기나긴 비행시간으로 지칠 대로 지쳐서, 어이없어 하면서도 첫 날 팁을 주고 나니, 이후 두 번의 같은 상황에서는 또 익숙하게 팁을 건네게 되네요.

 ‘마음으로부터의 동의 없이’라는 부분이 좀 용납이 안 되서 그렇지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정도 하는 1달러쯤의 팁이 벨 보이나 객실 청소원들의 ‘생계’라고 생각하면 조금쯤은 너그러워져도 되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냥 기분 좋게 건네면 될 것을 또 이렇게 끝까지 따지고 규정하고 정리해야 속이 시원한 것도 병은 병입니다.  

 

친환경 컨셉의 호텔

 이스탄불에서의 첫 호텔이었던 Hotel Prince가 다른 호텔들과 좀 달랐던 부분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고 국가 경영과 기업 경영, 개인의 생활에까지 점점 깊숙이 스며들고 있는 ‘친환경’을 컨셉으로 하는 호텔 운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얼마나 친환경 개념을 잘 구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 아이의 아토피와 다년간 싸워오며 친환경이 개인적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점점 더 절실하고도 분명하게 느껴왔던 저는, 욕실과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재생 종이에 프린트 된 안내문들의 글귀들을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아이에게도 읽어보게 하고 ‘친환경’의 구체적 실천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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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9 친환경 경영 이념의 호텔 객실 안내문

                           ◀In respect of the environment▶

 Environmental awareness is a focus at the Prince and all over the world.

 In an effort to further our conservation program, we will be changing your   guest room sheets every third day.

 If you do not wish to participate and like your sheets changed daily, please place this card on your pillow.

 This efforts will result in a saving of 18,000 liters of water and 290,000 kwh of electricity.

 Thank you for being part of our environmental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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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ar Guest▶

 Can you imagine how many tons of towels are unnecessarily washed every day in all the hotels all over the world and the monstrous amount of washing powder needed which thereby pollutes our water?

 Please decide.

 Hand-Towels replaced on the towel - rail means, I will use it again.

 For the sake of our environment.

 

 

제 2일.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다.

   

뜻하지 않게 맞이한 이슬람 명절 ‘바이람’ 

  이스탄불에서 첫 날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그리스의 아테네(터키 공항에서는 ‘아티나’라고 하더군요.)로 떠나기 위해 전 날 밤 도착했었던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다시 갔습니다. 서울에서 이스탄불까지의 거리에 비하면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이 못되는 지척이라고 할 수 있는지라, 어차피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이런 식의 찍기 관광’인 단체 버스 여행 일정에 ‘점’ 하나 더 찍자는 욕심을 내 본 것이지요.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여행 일정이 이슬람의 최대 명절인 ‘바이람’ 기간 중 ‘쿠르반 바이람’ 기간(해마다 조금씩 변하며 2005년엔 1월 20일~ 24일까지)을 포함하는 것이어서 여행 도중 예상치 않았던 상황과 풍경에 종종 맞닥뜨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인상 깊은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여행 떠나던 바로 그날 아침 신문에 바이람 기간 중에는 테러 등의 위험이 예상될 수 있으니 되도록 중동 지역, 특히 메카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의 여행을 자제하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니지만 전 국민의 98% 이상이 무슬림인 터키에까지 뭔가 불똥이 튀기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 경천동지의 대지진이 일어났던 터키 여행을 앞두고 여행자의 마음이 또 불안해집니다.

 아테네 베네줄리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갔던 아타튀르크 공항에는 바이람 명절을 맞이하여 차도르를 둘러 쓴 여인들을 비롯하여 이슬람 성지인 메카로 향하거나, 고향을 찾거나,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하는 사람들로 무척 붐볐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절 대이동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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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0.  이스탄불 신시가지 탁심 광장의 쿠르반 바이람 명절 축하 현수막

 

아테네 베네줄리 공항  

 가슴 설레는 첫 날 여행부터 어김없이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아테네 베네줄리 신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베네줄리는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에 견줄만한 그리스의 독립투사라고 합니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도, 아테네의 베네줄리 공항도 그들의 역사 속에서  존경받고 있는 영웅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이 지어졌네요. 외국의 경우를 보면 이렇게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인물들의 이름을 딴 거리나 광장, 건물 등을 볼 수 있는데, 그럼으로써 오래도록 그 인물을 기리고 역사적 아픔과 기쁨을 되새겨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거리나 광장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잘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토록 존경할만한 인물이 없지는 않을텐데 우리가 좀 무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인 슈사인(SHOE SHINE) 코너가 멋드러지게 공항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색적이었습니다. 구두 닦는 곳은 아테네 뿐만 아니라 터키에서도 심심찮게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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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1. 아테네 베네줄리 공항 내의 구두 닦는 곳

 

30년만의 기상 이변을 아테네 시민과 함께 겪다.

 이번 여행은 비바람과 함께 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리스, 터키는 겨울이 우기라는 사전 정보가 있긴 했지만, 학창 시절 지중해성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고 어쩌고 하던 기억과는 달리 완전히 기대를 벗어난 날씨의 연속이었습니다. 멋진 여행을 기대하며 조바심치던 여행자는 심한 배신감마저 느낍니다.

 서울에서 상상한 그리스의 이미지는 포카리 해의 숨 막히는 파란색과 눈부신 태양과 그 빛을 한껏 반사하는 흰 회벽 건물들이었지요. 하지만 온통 올리브 나무들만이, 그것도 특별히 줄지어 서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생겨난대로 여기저기 서 있는 듯한 ‘마라톤 평야’를 끼고 달려 진입한 주말의 아테네 시내는 연일 계속되는 비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싶게 보이질 않고, 차창에는 무심한 비만 투둑 투둑 부딪칩니다.

 작년 말 남아시아를 강타했던, 지축을 뒤흔들 정도의 초강력 지진 해일과 관련하여 대양의 상하 좌우의 물에 엄청난 교란이 일어났고, 전 지구에 걸쳐 통해 있는 바다 물길에 의해 그 여파까지도 점차 전 세계에 파급되어 가고 있어서 세계 곳곳에 이상 기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요.

 아테네 현지의 신문이며 방송에서 30년만의 이상 기후라며 대서특필 하고 있었습니다. 강풍을 동반한 악천후와 그리스 북쪽 지역의 폭설로 초등학교들에는 휴교령이 내려지고 도로 곳곳이 진입 금지되기도 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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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2 하수구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도로에서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자동차

 여행 둘째 날 ‘고린도’로 갈 때도 진입을 금지하고 있는 도로를 버스 운전사가 현장 경찰과 협상하여(곧 비행기로 출국할 사람들이라 급하다고 했답니다.)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차바퀴가 물살을 가르고 가는 정도의 도로 사정은 한국에선 거의 일상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도로 가장자리에 물이 찬 정도의 거리도 그나마 100미터 정도에 불과했고, 아무리 도로를 살펴봐도 왜 그리들 난리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가이드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안에 있던 8명이 실종되고 여러 척의 배가 파손되는 등 바다에서는 꽤 큰 피해가 있었던 것 같고, 겨울이 아무리 우기라고 해도 ‘한국인에겐 어느 정도 일상적인’ 이런 정도의 날씨조차도 아테네인들은 겪어본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탓에 도로에 하수구 시설도 제대로 없답니다.

 척박한 환경과 시련이 개척 정신과 개발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또 새삼 느껴봅니다.

 이렇게까지 젖은 도로를 달려본 경험이 별로 없는 아테네 시민들이 저마다 거북이 운전을 하는 탓에 아테네 시내는 교통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마른 길에서는 다소 난폭 운전을 하기도 하고 시속 120정도는 예사로 밟던 우리의 버스 운전사도 젖은 길에서는 엉금엉금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백짓장 하나 정도의 틈만 있어도 빠져나가는 절묘한 운전 솜씨는 서울 사람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다.

 흔히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면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곳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리스와 터키의 고대 유적지에 곳곳에 아크로(높은) 폴리스(도시)가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대학 시절의 도서관 앞 광장을 얼핏 떠올리던 저는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진짜’ 아크로폴리스의 장엄함과 엽서 속 그림만으로도 언제나 압도당하곤 했던 파르테논 신전의 위용에 잠시 숨을 멈추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를 오르기 전에 잠시 멈춰 아테네 시가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수도권 인구 밀집이 심각한 문제인 듯 합니다. 내려다보이는 평원과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 구석구석까지 집들이 빼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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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3.  아크로폴리스 오데온 너머로 보이는 아테네 시내

 

 바로 아래에 보이는 ‘오데온 극장’에서는 우리가 흔히 ‘오케스트라’라고 칭하는 ‘반원형 극장’의 전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곳이 그리스가 배출한 세계적 음악가 야니(Yanni)의 아크로폴리스 공연이 있었던 곳입니다.

 천상의 목소리 나나 무스꾸리와, 음유 시인 조르쥬 무스타키도 모두 그리스인입니다. 지중해의 미풍이 그런 서정과 감성을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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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4  아크로폴리스 오데온.

                             1993년 이 곳에서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 야니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제 남편 차에서 야니의 아크로폴리스 공연 실황을 담은 오디오 시디가 돌아갑니다. 예전에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매료되었던 ‘산토리니’가 첫 곡으로 울려 퍼지니, 그    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신세계’문을 열고 첫 발을 내딛는 것 같은 부푼 가슴이 됩니다.  

 아크로폴리스를 오르는 길에 올리브 나무들 사이로 바람은 쉼 없이 불어대고, 드디어 그 엄청난 기둥들이 도열해 있는 신전을 저만치 앞둔 신전 입구 계단에 올라서니 바람은 더욱더 거세게 휘이 휘이이 휘이이잉 불어댑니다. 입구의 양 쪽 기둥을 사이에 두고 잠시 신전을 바라보고 서 있으려니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몰아치는 바람에 어쩐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만 할 것 같은 외경심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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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5 파르테논 신전에 오르는 입구

 

 아테네를 굽어보는 아크로폴리스 사방에서 몰아치는 그 세찬 바람에 저는 잠깐 잠깐씩 발이 들리며 순간적 공중 부양을 경험하고, 큰 아이는 아예 붕 떠서 서너 걸음을 바람타고 날기도 했습니다.

 일상에서 탈출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기 만한 여행자들은 바람에 숨이 막히고 휘청대면서도 “오우~ 우리 모두 너무 ‘미모’들이라 헤라가 질투하나봐” 이렇게 농을 주고 받으며 휘몰아치는 그 바람과 그 고통을 기꺼이 즐겼습니다. 

 

 일생에 한번은 꼭 올라보시라, 파르테논 신전에.

 교과서와 교양 역사책의 그 많은 설명들, 다 필요 없었습니다. 일단 한번 그 곳에 올라 그 기둥들을 멀리서 보고 또 가까이서 보니, (감정을 약간 증폭시켜 본다면) 흔히 하는 말로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지구 반대쪽에서 날아온 이국의 여행자를 사로잡는 것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유적 제 1호이기 때문만도 아니고, 배흘림 기둥의 그 웅장함 때문만도 아니고, A4 복사용지로 전이된 그 황금 비율의 완벽한 조화와 균형 때문만도 아니고, 인류 최초의 설계도를 가지고 건축된 역사적, 예술적 건축물이기 때문만도 아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서 있던 그 자리에 붙박히기라도 한 듯 바람 몰아치는 사방을 경외감으로 둘러보게 만드는, 초언어적으로 압도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기운 같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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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6.  파르테논 신전 앞에 선 딸아이

 그같이 장엄하게 압도되었던 심장의 두근거리는 박동이 아직도 그대로인 채로 신전 지하 한쪽에 마련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둘러보자니 어쩐지 가슴 한 쪽부터 저리고 아파왔습니다.

    

                                       대영박물관이여!

                                     루브르 박물관이여!

          그대들이 약탈해간 전리품들을 어서 빨리 제자리에 돌려놓으시라!

 

 분노한 제우스가 입김이라도 불어대는 듯 바람이 휘몰아치던 아크로폴리스와 신전의 장엄함에 견주어 어찌 이리도 초라한 행색인지...... 그나마 전쟁과 지진 등으로 훼손된 목 잘리고 팔 잘린 석상들....., 성한 조각상을 거의 볼 수 없음에 눈물마저 핑 돕니다.


아테네인들은 ‘네모’를 좋아한다?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와 버스를 타고 내다본 창 밖의 도시 풍경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아마도 ‘square’라는 단어가 될 것 같습니다.

 건물도 네모, 창문도 네모, 정말이지 끝도 없는 ‘네모’의 연속입니다.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고 쓸데없는 장식을 배제하는 그리스인 특유의 성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건축 기술이 그리 발달치 못했거나 그 필요성조차 그다지 못 느끼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 저런 나름의 상상은 제법 즐거웠지만 아테네에서 단 이틀간을 머물다 갈 뿐인 여행자가 그 실상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언제 닥칠지 모를 지진의 위협과 산적한 유적지 보호를 위해 고도 제한을 받는 탓에 서울에선 흔한 아찔한 고층 빌딩들은 찾아볼 수 없고, 높이와 크기도 고만 고만하고, 디자인과 색깔도 조금씩만 다르면서도 서로 간에 어우러지는 풍경들이 제게는 소박하고도 편안하게 느껴져서 좋았는데 다른 분들은 너무 지루하다고도 하십니다.

 ‘단아한 기품’이라는 저의 정리에 너무 미화시킨 것 아니냐는 반응이십니다. 하기야 ‘이국적인 풍경’의 극치를 이루는 이스탄불에 비하면 그렇기도 합니다.

 아테네의 길들이 반듯반듯 쭉쭉 뻗은 길들은 아니었던 것이 어쩌면 다행입니다. 길

까지 네모의 연속이었다면 정말 지루하기도 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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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7.  아테네 시가지의 건물들.

                    건물들의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분위기.  차창 밖으로 비는 계속 내리고......

 

고대 올림픽 경기장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양궁 경기가 열렸던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서  잠깐 차를 내려, 있어봐야 별 도움 안 되고 성가시기만한 우산을 접고, 그새 잠시 잊었던 그 날의 감격을 되새기며 잠시 감흥에 젖었습니다. 

  아테네를 떠나던 날 공항으로 가던 길에 본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은 올림픽을 치루었다고 생각하기엔 그 규모나 건축 디자인 면에서 너무 평범하고 사실 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해서 망스러웠지만, 말발굽 모양의 오픈 경기장인 이 곳은 규모가 장대한 것은 아닌데도 뭔가 묵직한 감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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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8. 아테네 고대 올림픽 경기장  

 

가슴 저미는 역사와 연예계 가쉽이 공존하는 곳, 신타크마 광장.

 또다시 버스를 타고 경기장을 지나 당도한 곳은 아테네를 관광하면서 몇 번이나 지나가게 된, 우리의 여의도나 파고다 공원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 신타크마 광장입니다.

 우리의 일제 치하보다도 더 강압적인 통치를 받았다던(그리스인들 생각이겠지요?) 식민 시절을 마감하고 독립 선언을 했던 곳이 바로 이 곳이고, 따라서 아테네 시민 가슴속 깊은 곳에 설움과 애정과 자부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바로 신타크마 광장이라고 합니다.

 광장을 중심으로 한 쪽에는 국회의사당이 위치하고 있는데, 저희가 그 곳을 지나게 된 때에 마침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훤칠하게 키가 크고 용모 준수한 장정들이 멋진 베레모와 이국적인 복색을 갖춰 입고 한 팔에 긴 총을 받쳐 들고, 나머지 한 팔과 양쪽 다리를 번갈아 90° 각도로 ‘척 척’ 들어올리며 근위병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가는 모습은 여느 나라의 근위병 교대식과 마찬가지로 길을 가다 멈추고 볼만한 볼거리였습니다.

 근위병들이 신고 있는 특이한 신발은 민속공예품점 등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아주 예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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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9.  국회 의사당 앞의 근위병   교대식

 

 근위병 초소가 있는 약간 뒤쪽의 벽에는 ‘무명 용사의 비’가 있는데, 한국전쟁 참전을 명시해 놓은 글귀를 볼 수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치열했던 서부 전선 등에서 670여명의 그리스 병사들이 그들의 젊은 몸과 피를 한국에 바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 때 그들에게 ‘생명’을 빚진 적이 있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에 그리스인들에게 참으로 미안해집니다.

 그리스의 정치적 현장에 비켜서서 광장의 또 한 쪽에는 그랜드 브리태니 호텔이 있습니다. 이 호텔은 정계, 재계 고위 인사들이 머무르는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묵었던 것으로 유명세를 탄 호텔이랍니다.

 고상한 기품은 느껴지지만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햐얏트 호텔식의 현대적 외양의 번쩍거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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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0.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묵었던 곳으로 유명한 그랜드 브리트니 호텔

                               

 그리스의 정치적 현장과 숙연해지는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 화려한 연예계 뒷얘기를 담고 있는 이 호텔을 국회 의사당과 번갈아 보자니 어쩐지 세상에 대한 냉소가 스멀스멀거립니다.

 광장을 중심으로 국회 의사당을 마주보는 길은 서울의 명동과도 같은 패션과 상권의 중심지로서, 그 입구엔 어김없이 맥도날드가 한자리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행 갈 때 가장 큰 걱정이 화장실인 저 같은 사람에게 맥도날드는 아주 반갑기 그지없는 곳입니다. 아주 간혹 구입 영수증을 보여줘야 화장실 문을 열어주는 치사한 맥도날드도 있지만(독일인가 이탈리아인가의 어느 맥도날드였답니다. 얼마나 섭섭했던지 아직도 기억이......) 전 세계 어느 곳의 맥도날드 표지판이건 저게는 hamburger보다 toilet을 연상시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 상점 문들은 모두 닫혀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만약 일요일이 공휴일이 된다면 다음 월요일이 자동으로 휴일이 된답니다.

 평일에도 2시 반 경이면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고 집으로 가서 낮잠 한숨 자고(시에스터는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상입니다.) 어스름해지는 저녁 때가 되면 슬슬 거리로 나와 외식을 하거나 한답니다.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경우보다 외식을 더 자주 한다고 하네요. 국민 총생산이 우리보다 낮은 국가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치열함은 없는 곳이 바로 그리스랍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민 행복 지수’는 우리보다 높다지요?

 서울의 명동이 일요일에 더 북적대는 것과는 판이하게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고 게다가 비까지 추적대는 거리가 좀 썰렁하긴 했지만,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며 어설픈 기타 연주를 하는 짚시 아이도 있었고 나름의 한적한 낭만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간판과 가게 안에 불을 켜놓고 퇴근하는 데다 제품마다 친절하게 가격표들도 잘 보이도록 부착되어 있어서 들어가 보지 않고도 우리 일행은 윈도우 쇼핑을 실컷 할 수 있었습니다.

 듣던 대로 구두나 부츠, 가죽 쟈켓 등 가죽 제품들의 품질이 아주 좋아 보였고 가격도 서울의 백화점만큼 비싸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터키에서도 그리스에서도 느꼈던 것은 원자재 자체가 최상급이라도 ‘세련된 가공’과 ‘다양한 디자인’이 우리보다는 못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나저나 그 날이 일요일이라 그 거리에서 쇼핑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다행입니다. 만약 평일 오전이었다면 들뜬 여행객의 마음으로 지갑을 몇 번이나 열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최첨단 패션의 거리의 끝에 위치한 비잔틴 양식의 아담하고도 고풍스런 성당은 여행자의 마음을 조용하고도 겸손해지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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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1.  비잔틴 양식의 자그마한 성당 앞에서 딸아이와 함께

 

제 3일. 눈물의 ‘고린도’여

 

 30년만의 강풍에 ‘크루즈’는 날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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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2.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강풍으로

                                 그리스 국기를 비롯하여 깃발들이 펄럭이는 길가에

                                 우리 일행을 태우고 다닌 버스가 정차해 있습니다.

 ‘크루즈’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뭔가 낭만적이고 럭셔리한 여유’의 꿈에 부풀어 그렸던 상상의 그림은 그리스를 강타한 강풍으로 단번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노련한 가이드는 당일 코스로 가능한 차선책 두 가지를 제안하고 선택하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있던, 신약 성경의 고린도 전.후서에 나오는 그 고린도 유적지를 갈 것이냐, 각자 자비를 들여 아테네 시내를 둘러볼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25년간 교회에 적을 두었던 사람으로서, 또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서양사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또 이미 한나절을 버스를 타고 둘러본 아테네 시내에서 30년만의 기상 이변 탓인지 거리를 다니는 그리스 사람들을 거의 본 기억이 없었기에, 사람을 볼 수 없는 도시의 거리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호기심이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그다지 관련이 없으신 분들은 후자 쪽에도 혹하시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의외였던 것은 엄마가 가는 곳으로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큰 아이가 자기는 시내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선택하겠다며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와 시내 관광,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지긴 했지만, 이쪽도 저쪽도 모두 확실한 결정을 못 내리고 최후까지 결정을 보류하며, 변덕이 심하다는 지중해 날씨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보았습니다.

 밤사이 바람이 잦아들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룻밤 자고 일어났지만 역시나 그대로인 상황에 최후까지 기우뚱 갸우뚱 하던 마음들은 결국 모두 고린도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저는 ‘고린도도 좋다’싶었지만(사실 지나고 보니 겪어보지 못한 크루즈보다 겪어본 고린도가 더 소중하고 좋았다고 느껴집니다.) 일행 중에 꽤 불만이 있었던 분들도 계셨던가 봅니다.

 나중에 터키로 건너가서 에페스 유적지를 본 후에 그 분들의 불만은 더욱더 증폭 되어 ‘그리스, 터키에서 본거라곤 돌밖에 없네’하며 투덜거리셨다는, 그리고 터키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을 관광할 때는 ‘그래도 이 돌은 좀 낫네’하셨다는 후일담이 있었습니다.

 같은 버스를 타고 여행하게 된 그룹의 일원이지만 여행 전에 그렸던 밑그림들이 서로들 달랐었나 봅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달리 느낄 수 있고, 그 느낌의 깊이와 여운도 다 다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라는 것이겠지요.

 저는 ‘돌마다 다 다른 돌’들로 보였는데, 다른 분들에게는 ‘그 돌이 다 그 돌’로 보였나 봅니다. 

 어느 기둥의 조각인가 알 수 없었는지 제 자리가 아닌 듯한 곳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돌, 사람들의 논리와 상상력으로 다시 꿰어 맞춰진 돌, 숱한 전쟁과 지진에도 꿋꿋이 버티며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돌, 사도 바울이 디뎠던 돌, 사도 바울이 짚었던 돌, 수많은 노예들의 피와 땀이 묻었을 돌, 제국의 영화와 몰락을 함께 지켜보았을 돌. 

 때로는 애틋하고,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허망하게.

 돌 하나 하나는 그렇게 제각각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주워 담을 수 없는 커다란 돌들을 제 마음속에 담아왔고, 돌 수집이 취미이며 자신이 전생에 암석학자(Lithologist)였을 거라고 말하는 딸아이는 가는 곳마다 자그마한 돌 조각들을 주머니 속에 넣어왔습니다.     

 

달리는 교실에서의 다이제스트판 그리스 강의

 뭐 하나라도 더 들려주고 싶은 열정으로 뜨거우셨던 가이드님의 열강은 고린도로 가는 길에 교통 체증으로 지루했을지도 모를 시간들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단 몇 시간에 ‘압축판 그리스’를 맛보기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교사라서 그런지 그리스의 교육 제도에 특히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국비 장학생으로 아테네에 유학을 와서 현재 50이 넘은 나이가 되실 때까지 그리스에서 살아오신 분이니 ‘거의 그리스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의 말씀이라 별도의 확인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요약 정리하여 올려봅니다.  


■ 그리스의 교육 제도      

* 아래의 글 중 괄호 밖의 글은 ‘거의 그리스인’인 가이드님의 말씀이고, 괄호 안의 글은 단 이틀 아테네 거리를 버스로 달려본 ‘지나가는 이’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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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3 고린도 가는 길에 본 학교.

                     그리스의 겨울 방학은 우리보다 짧아서 1월이라도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한국 학제의 기본 틀의 오리진은 플라톤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플라톤이 기초한 학제는 영국, 일본 등을 거쳐 한국의 학제의 기본 틀이 되었습니다.

 플라톤이 세운 아테네 아카데미 대학은 한국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전 세계 대학 경쟁력 순위가 서울대보다 높은 68위입니다. (이 부분에서 반은 그리스인인 가이드님의 그리스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고국인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병원비는 물론,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공 서적비를 제외한 기본적인 교육비가 모두 무료입니다. 대신에 소득의 3분의 1 정도를 세금으로 냅니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사립학교는 없습니다. 아침을 먹지 않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아침 급식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대부분의 학교가 오후 1시 정도에 수업을 종료하기 때문에 점심 급식은 없습니다.

(점심때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점심을 차려 줄 수 없는 직장맘들은 어찌하나요? 하지만 아이들은 참 좋겠습니다.)  

▶ 교사와 학생 간에 자유로운 분위기가 많은 편이어서 고등학생의 경우엔 선생님과 맞담배를 피우며 대화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교사의 교육 행위로서 ‘구타’는 절대 불가하며 최고의 벌은 ‘운동장에 나가 서있기’입니다. 수업시간에 자거나 딴 짓을 좀 한다 해도 전체 수업 분위기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면 크게 나무라지 않습니다. 초등 4학년부터 유급제도가 있고, 유급할지 진급할지는 개인의 노력과 선택의 문제니까요.

(자는 아이 깨워가며, 떠드는 아이 조용히 시켜가며, 딴 짓 하는 아이 나무라가며 어떻게든 전체를 수업에 집중시키려 애쓰는 우리의 교실 풍경과는 사뭇 다르네요.)

▶어린 아이들이 차를 타거나 길을 여러 개 건너가며 먼 길을 이동하여 학교를 다녀서는 안 된다는 기본 생각 하에 아이들 걸음으로 10분 이내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마다 학교가 있고, 따라서 학년 당 학급이 한 학급 혹은 두 학급 정도인 ‘작은 학교’가 많습니다. (등, 하교길 교통 사고율이 높은 우리로서는 이도 참 부러운 일입니다. 저도 ‘작은 학교’와 ‘마을마다 도서관’을 간절히 바라는 시민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한 학급에 학생이 서너 명만 있어도 교육이 진행되며 만일 신입생이 없는 경우 해당 교사는 경비 업무를 하게 됩니다.

▶초등학교의 경우 노트와 연필 등 수업에 필요한 기본적 문구류는 모두 학교에서 제공하고, 저학년의 경우 연필도 선생님께서 깎아주며 학생 개개인의 사물함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이 부분 무척이나 부러웠으며, 한국의 학생들도 어서 빨리 무거운 책가방에서 해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 방학은 한 달, 여름 방학은 석 달 열흘, 크리스마스 방학 1주일, 부활절 방학 열흘, 이렇게 일년에 5개월 정도가 방학입니다.(나는 소망한다. 봄방학, 여름방학, 가을방학, 겨울방학, 이렇게 계절마다 방학이 있기를)

▶교사 월급은 아주 적으며 방학 중 월급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서 교사는 아주 인기 직종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은 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럽게 놀기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돈과 집과 사회적 명예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생활의 여유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그리스 선생님들, 저와 이상이 아주 비슷하시군요.)

▶학급당 학생수는 초등학교 14명,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20명 정도 입니다.(아! 정말 부럽습니다. 제 평생에 20 명 이하의 학생들을 앞에 두고 수업할 날이 있을까요?)   

▶초등학교의 경우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담임 선생님께서 쭈~욱 담임을 맡으십니다. (이 부분에서 대개의 대한민국 학부모님들 떨고 계시지요? 으헉! 만약에 안 좋은 선생님이 걸리면 6년 동안 죽음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적 장치가 성숙되어 있다면 그런 염려는 그리 크게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 믿습니다.) 만약 교사에게 문제가 있어서 학부형으로부터 불만이 접수되면 교육청에서 해당 교사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게 되고, 결과에 따라 교육청 직원으로 발령을 내기도  합니다.

 그리스의 교사들에게는 막강한 권한과 함께 의무도 주어집니다. 학부모들은 한 달에 한 번 반드시 담임교사의 상담 소환에 응해야 하며 특별한 이유 없이 불응할 경우 담임교사의 교육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정하여 전학 조치될 수도 있으며, 교사는 전학 올 학생과 학부모를 면담하여 그 학생의 전입을 거부할 수도 있는 ‘학생 선택권’이 있습니다.( 앞으로 시행될 예정인 우리의 ‘교사별 평가’도 교사의 권한이 강해지는 만큼 의무도 강해지는 것으로서, 문제는 얼마나 내용을 채워 그 취지를 구현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선행학습’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이드 하시는 분 자신도 그리스에 처음 와서 아이를 입학시켜 놓고 먼 이국땅에서 한국 아이로서 기죽을까 염려되어 조금만 미리 가르친다고 가르쳐 보냈더니, 아이의 담임선생님께서 당장 면담을 요청하시더랍니다. 놀란 가슴으로 제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물으니, 아이는 문제가 없고 당신이(부모가) 문제가 있다 하며 그렇게 교사인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홈스쿨링을 하거나 다른 적절한 교육 기관이나 교사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들으며 아주 망신살이 뻗친 적이 있다 합니다. (나는 정말 소망한다. ‘학교’에 다니면서 선행학습 하는 아이들이 없는 나라를)   

▶초등 4학년부터 유급제도가 있어서, 원하면 죽을 때까지 무료로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지만 일정 학력에 도달하지 못하면 진급을 할 수 없습니다. 대학에도 정원은 없으나 졸업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에 정원이 없다면 아마 ‘대란’이 일어나겠지요?)

 그리스는 한국처럼 너도나도 누구나 대학을 가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사무직보다 현장 근로자의 임금이 훨씬 높고, 정말로 학문적 관심과 필요가 있는 사람들만 가는 풍토이기 때문에 이런 제도의 유지가 가능합니다.

▶교육청 공무원은 별도로 모집하지 않으며, 현장 교사 중 50세 이상의 교사들이나 현장 부적응 교사들을 교육청에 배치하여 교육 현장과 교사의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연륜과 경험은 풍부하지만 어린 학생들과 지내기엔 정서적 교감이나 체력적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교사들을 교육청의 후방지원 업무에 투입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리스의 교육청은 한국의 그것처럼 ‘간섭과 통제’의 느낌을 주는 성질의 기관이 아니며, 교감이라는 직책은 아예 없고, 교장의 업무 내용은 한국의 경우처럼 교사의 교육적 활동을 통제 관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교사의 교육적 활동을 보조하고 지원하며 물리적 환경을 정비하는 일종의 ‘경비원’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듣던 중 가장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교육청 관리 여러분과 교감, 교장 여러분께는 죄송합니다만 대한민국 교사에게 있어서 ‘교육청’이라는 존재는 ‘간섭’과 ‘통제’와 ‘불필요한 공문 하달’이라는 우울한 이미지뿐이랍니다. 또한 ‘자리’를 위한 ‘자리’인 교감이라는 직책과 주임(또는 부장)이라는 직책도 교육 본연의 목적에는 그다지 필요치 않은 자리거나 다른 개념의 자리 매김이 필요한 자리라 여겨집니다.)

▶연금은 55세부터 지급받을 수 있으며, 원하면 6,70대 이후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지만 그리스인들은 누구나 55세에 정년합니다.

 연중 온화한 날씨와 풍부한 관광자원, 천성적인 느긋함 등으로 한국과 달리 전반적으로 경쟁의식이나 교육열이 희박한 편입니다.

 대학원은 거의 필수가 되다시피 하고 박사도 너무 많은 ‘고학력 인플레이션’의 한국과 달리 법대 학부를 졸업하는 것만으로 무조건 변호사 자격증이 주어집니다.(입학은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졸업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했으니 한국의 실상에 견주어 자격증의 권위를 크게 염려하지는 않아도 될 듯 합니다.)

 취미와 생계 수단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그리스인들은 ‘공부’도 일종의 취미 생활로 생각하여, 아무리 아테네 최고의 대학을 나왔어도 부모의 가업을 잇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 정부는 강력한 물가 안정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고 있으며, 특히 먹거리 가격은 강력한 저물가 정책을 펴는 탓에 바게트 한 덩어리에 60 유로 센트, 오렌지 8~9개에 1유로, 소고기 1kg에 한화로 3,200원 정도 합니다.

 하류층은 아주 얇으며 중산층이 매우 두껍고, ‘집’은 그저 ‘주거’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부동산 투기 등이 거의 없고, 그런 이유로 ‘나대지’로는 저당을 잡힐 수도 없습니다. 1 평방미터에 평균 1 유로정도 합니다. 그리스에 무인도들이 엄청 많으니 관심 있으신 한국 분들 한번 투자해보십시오.      

(그리스의 국가 정책 구현에는 ‘사회주의적’인 모습이 많이 느껴집니다. 구성원간의 경쟁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회 발전의 원동력인데, 아무리 이상적인 제도가 안정적으로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랜 기간 강력히 국가 주도적으로 이루어져갈 때의 부작용으로서 그리스 국민들이 자칭 ‘느긋함’이라 칭하는 이면에 ‘무기력’이나 ‘무의욕’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과객’의 생각이란 것이 무슨 소용에 닿는 일이겠습니까?.)

 

고린도 가는 길                    

 

■ 그리스 속의 한국

 고린도로 가는 길에 그리스 굴지의 정유회사 정유탑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정유회사의 컴퓨터 제어 시스템을 한국에서 개발하여 관리하고 있답니다.

 그리스 시내 곳곳에서 자동차 전시장들도 여러 곳 볼 수 있었는데, 한국의 현대 자동차가 그리스 전체 자동차 시장의 9.8%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테네 지하철 건설도 한국의 기술이라고 합니다. 지하철 개통하는 날 시승식에서  개발자의 요청에 따라 지하철 한 량에는 한국 교민들이 탔었다고 합니다. 

 “ 세계 곳곳 중요한 곳엔 한국인이 있다”

 한국에 사는 우리들보다 머나먼 이국에 사시는 분들의 고국에 대한 자긍심이 더 대단하십니다. 

   

■ 고린도 운하

 고린도 유적지를 가는 길에 세계 최초의 운하로서 네로 황제가 수많은 노예들을 동원하여 파 놓았다는 고린도 운하를 보았습니다.

 운하는 당시 상업의 중심지였던 고린도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겠지요.

 버스를 내려서 운하를 내려다 본 우리 일행은 첫마디에 ‘오우~’하고 길게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려다보이는 운하는 아주 아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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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4 고린도 운하

 

고린도 운하 옆 휴게소 앞에 나란히 세워둔 자동차들 속에서 한국의 현대 자동차를 발견하고 괜히 흥분하기도 했지만, 그 후로도 한국 차는 심심찮게 볼 수 있어서 나중에는 그리 큰 흥밋거리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휴게소 앞의 뽕나무가 이색적입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었던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가 이 뽕나무인감?‘ 하며 신기한 듯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그런 모양과 크기의 뽕나무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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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5 고린도 운하 옆 휴게소앞에 서있는 자동차들 중에

                                          현대 자동차가 보입니다. 나란히 서있는 뽕나무들도 이채롭습니다.

 

 고린도 운하에 현기증을 느끼며 고린도 유적지를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현지 가이드가 자꾸만 저 멀리 산봉우리에 쌓인 ‘눈’을 보라고 합니다. ‘눈’ 볼일이 흔치않은 남부 그리스인에겐 ‘눈’이 구경거리겠지만,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도록 눈 쌓인 설악산이나 소백산 줄기를 헤매본 사람들에게 고린도의 눈 덮힌 산이 그리 큰 감흥일리가 없지요.


■ 고린도 유적지

 고린도 유적지의 한 쪽 배경인 듯 솟아있는 봉우리가 바로 시지프스가 바윗돌을 굴려올리고, 또 굴려올리는 벌을 받았다는 시지프스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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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6.  고린도 유적지. 뒤편의 산이 시지프스 산.

 

 유적지 입구에는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입구의 두 석상은 모두 머리를 잃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의 유적지에서는 우상 숭배 타파 등의 종교적 방해와 전쟁, 지진 등의 상흔으로 이렇듯 몸이 성치 못한 조각상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곳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이 가능했지만 플래쉬를 사용해서는 안 되었고, 유물과 함께 사람을 찍어서는 안 되며 유물만 촬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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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7 고린도 유적지 박물관.

                                      입구의 석상 두 개는 모두 두상을 잃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한 쪽 노천에 다양한 양식의 기둥들을 시대별로 줄맞춰 세워 놓은 곳이 있어서 아이와 함께 시대에 따른 기둥 양식의 변화를 확인해보았습니다.

 폐허인 듯한 유적지,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유적지의 잔해들 사이를 거니는 일은 언제나 묘한 흥분을 가져옵니다. 로마와 아테네와 에페소가 런던과 파리와 뉴욕과는 다른 매력을 가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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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8.  고린도 유적지 박물관 옆에 전시된 시대별 기둥 양식들.

                                               왼쪽부터 도리아, 이오니아, 고린도 양식

 

  힘차고 남성적인 도리아 양식의 아폴로 신전의 한쪽에 비껴서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도 볼 수 있는 마가목이 홀로 외로이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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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9.  도리아 양식의 아폴로 신전

 

 상업의 중심지였던 고린도답게 당시 16km에 달했다던 상가들의 일부가 유적으로 남아있는 곳들을 지나니 웬 돌이 하나 서 있습니다.

 한쪽이 심하게 깎여나간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송에 휘말려 재판정에 서서 피고로서 손을 짚었던 부분입니다. 상대적으로 파손이 덜한 반대쪽은 원고가 짚었던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짚었던 부분이라 하여 사람들이 조금씩 몰래 깎아내어 가져가곤 해서 이렇게 비대칭의 돌이 되었다 합니다.

  ‘신앙’과 ‘사랑’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건만 사람들은 이렇게 ‘형상’을 쫓아가곤 합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인데도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으며 짚었던 돌이라 하니 그의 일생동안의 지난한 전도 행적들이 제 가슴을 밟고 지나가는 듯, 제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밀려 올라오는 듯, 가슴이 옥죄여 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일행 중의 한 분은 이 돌 앞에 무릎을 꿇고 기어코 눈물을 쏟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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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0                                                    그림 31

 재판정에서 사도 바울이 피고로서 짚었던 돌.    사도 바울이 짚었던 돌 앞에 무릎을 꿇고

                                                                 뜨거운 눈물을  쏟고 마는 일행 중 한 선생님

 

   이번 여행을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하여 남기라면 저는 이 사진을 내밀겠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돌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자신이 사모하던 한 인간의 뜨거움을 느꼈을 때, 그 뜨거움 앞에서 나 자신이 한없이 낮아지면서도 진솔해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일상을 떠난 여행자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공부이자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돌’로 한껏 정화된 여행자는 이제 피레네의 샘 앞의 옛 화장실을 보며 그 곳에서 볼일을 보았을 사람들을 상상하며 유치해집니다.

  성서 속에서 계수되는 ‘사람’에 여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듯이, 당시의 공중 화장실도 남성 전용이랍니다. 그럼 여자들은 어디서 볼 일을 보나요? “허허허 그건 각자 알아서 해야지요.” 지난 역사속의 남의 나라 일이니까 “호호호~ 그랬었군요~.” 하고 참아 넘길 만합니다.  

  당시의 화장실은 단순히 볼일만 보는 곳이 아니라 남성들의 사교와 대화의 장이기도 했다는군요.

  아래로 물이 흐르고 위에 구멍이 파인 곳마다 한 사람씩 주루리 앉아 볼일을 보면서 정치, 사회, 경제 대담을 나눴다나요. 볼 일을 다 보고 나면 구멍 아래로 떨어진 내용물들은 아래의 흐르는 물을 따라 흘러 흘러 에게해로 흘러간다 하니, 에게해의 초록빛 바닷물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는 일이 잠시 괴롭습니다. 볼일을 다보고 나면 앞의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로 밑을 닦았다 하니 ‘수동 비데’의 원조인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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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2.  고린도 유적지의 옛 화장실.

 

  유적지를 나오며 뒤를 돌아 저 멀리 시지프스 산부터 한번 더 고린도 유적지를 눈으로 훓고는, 오른 쪽 언덕에 있는 바울의 초대 교회로 향했습니다.

   ‘초대 교회’라는 말에 또 눈시울이 시큰거립니다. 교회의 분열을 슬퍼하고 책망하며 사도 바울이 초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랑의 서신’인 고린도 전서 13장의 내용은 꽤 유명한 복음 성가로도 만들어지고 불려 와서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그저 ‘건물’로만 보이는 사람들이 명랑하고 즐겁게 기념사진을 찍는 동안, 사도 바울의 돌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렸던 선생님께서는 초대 교회의 문고리를 잡고 또 한번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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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3.  사도 바울의 고린도 초대 교회

 

  고린도에서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에 사도 바울이 서원을 마친 후 머리를 깎고 에페스로 출항했던, 또한 최초의 여성 집사였다는 베베가 로마서를 들고 떠났다던 ‘겐그리’ 항구가 있었던 바닷가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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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4. 사도 바울이 서원을 마치고 머리를 깍은 후 에페스로 떠났던 겐그리 항

 

  바닷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돌들의 어딘가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오래전 항구였다는 설명을 연결시키는 일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건 여행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일입니다.

  아테네와 고린도 사이의 길가에서 저게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자그마한 설치물들을 간간히 보았습니다. 십자가도 있고 성경책도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가이드에게 질문하니, 그 설치물들이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영혼을 기리는 것이라 합니다. ‘길 위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진혼과 추모의 의미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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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5.  길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사망 현장에 서있는 모습

 

  산업화, 분업화, 도시화가 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집에서 태어나거나 집에서 죽거나 하기보다 생의 시작과 끝을 ‘병원’이라는 곳에서 맞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좀 더 가족과 종교와 지역 공동체적 정신의 원류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의 무덤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과 고향, 바로 그 곳이거나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공동체와 구성원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죽은 자들이  공동체 안에 묻히기도 하고 밖에 묻히기도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주도에서 보았던 ‘집 앞 바로 문 밖의 돌무덤’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저는 저도 그렇게 제가 가족과 함께 살던 바로 그 곳에 오래도록 묻혀 있고 싶다고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구석구석 무덤으로 채워질 생각을 하니 그냥 한 줌의 재로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더 낫겠다 싶습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타국인들이지만 비명횡사했을 그 영혼들을 떠올리며, 하나라도 놓칠새라 이국의 풍경들을 열심히 새겨두려 정신없었던 제 두 눈은 한동안 초점을 잃고 망연히 창밖 풍경을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 눈에 물이 채워진 옥외 수영장이 하나 들어옵니다. ‘이 겨울에 웬 옥외 수영장?’ 하고 의아했는데, 그리스엔 시청마다 옥외 수영장이 있고 겨울에도 물을 데워 사용한다고 합니다. 하긴 저희가 아테네를 방문했던 기간에 공교롭게도 30년만의 이상 기후가 닥쳐서 그렇지, 그리스의 겨울 평균 기온이 영상 9도 정도이니 전 세계에서 가장 놀기 좋아한다는 그리스인이 겨울이라도 데운 물을 채워 넣은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풍경이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겠습니다. 

  이젠 제법 친숙하여 반갑기까지 한 신타크마 광장을 지나서, 여행 기간 중 이제 다시는 맛볼 기회가 없는 ‘한국 음식점’(아테네에 한국 식당은 딱 두 곳 있습니다.) ‘귀빈 식당’으로 가서 미역국과 조기구이와 쌈밥을 원 없이 먹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는 한참 자고 있었을 새벽 3시경에 말입니다.  

  뭐 하나라도 더 눈에 넣고, 뭐 하나라도 더 가슴속에 새겨가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가득한 여행자들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칫솔질만 하고는 프론트 데스크에서 지도 한 장 얻어 들고 무작정 아테네의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밤의 모습’까지를 보아야 비로소 그 도시를 보았다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전 날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입구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석상이 있고, 지붕 위에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이 우뚝 서있는, 그리스 최고의 대학 아카데미 대학을 목적지 삼아 간 것이긴 했지만, 이상 기후로 현지인들이 뜸한 밤거리를 일단의 한국인들이 접수하여 마음껏 아테네의 밤공기를 마시는 기분이 썩 괜찮았습니다.

  아테네 거리의 건물들은 높이와 규모, 디자인과 색상의 조화가 ‘지나치게’ 잘 이루어져서 자칫하면 여행자들이 길을 잃기 십상이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맥주 집에 들러 맥주도 한잔씩 하고 나니, 긴장과 흥분과 시차 부적응으로 전전반측했던 첫 날과 달리 새벽 5시에 모닝콜이 올 때까지 죽은 듯이 잘 수 있었습니다.       

 
 

제 4일. 다시 이스탄불로


이스탄불로 들어오는 길

  이스탄불로 들어서면 도시를 세 겹으로 둘러쌌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곳은 보수의 손길이 닿은 흔적도 있고 또 어떤 곳은 방치된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버스가 달리는 도로 변에 길게도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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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6.  이스탄불 서쪽을 세 겹으로 에워쌌던 테오도시우스 성벽

 

  유럽과 아시아의 길목에 위치한 도시였던 이스탄불은 시대에 따라 도시를 지배했던 주인이 바뀜에 따라 그 이름도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 등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도시의 이름 속에 정복과 패배, 영화와 쇠퇴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오리엔트 특급은 이스탄불의 시르케지 역이 그 종착역이었습니다. 유럽을 달려온 기차는 유럽의 끝 이스탄불에서 멈추었던 것입니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이 역에서 내려 전용 페리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건너편에 있는 별장에서 집필을 하곤 했답니다. 배낭여행자였다면 당연히 시르케지 역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입니다만, 버스 관광 여행자는 그저 ‘일견’에 그쳐야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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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7.  오리엔트 특급의 종착역이었던 시르케지역

  이스탄불 시내를 진입하여 자그마한 공동묘지 하나를 지나쳐 갔습니다. 도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나 있는 우리네 공동묘지와는 달리 유럽의 공동묘지들은 주택가 한 복판에도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서도 공동체이고 죽어서도 공동체라는 의식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생을 마감한 바로 그 마을 안에 죽은 자의 영혼이 쉴 곳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사흘장이 관습인 우리와는 달리 24시간 이내에 매장을 한다고 합니다.

  점심 식사할 식당으로 가는 길에 ‘KORELI’ 라는 간판의 철물점을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한국전에 참전했던 병사들 중에 고국에 돌아와 이런 간판의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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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8.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 중 ‘한국의’라는 뜻의 간판을 건

                                               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켜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무색하게 우리는 터키를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 한국과 한국인들을 ‘형제의 나라’, ‘피를 나눈 형제’라 칭하며,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매우 호의적이라고 하니 낯선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이 한결 푸근해집니다.

     

지하 궁전(지하 물 저장고)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톱카프 궁전과 같은 대단한 유적들을 휘이 둘러볼 수 있는 이스탄불 구시가지에는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지하 물 저장고도 있습니다.

  비잔틴부터 오스만 왕조까지 물 창고로 쓰이며 술탄(황제)들이 뱃놀이도 했던 이 곳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는 술탄들의 물 저장고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며, 그 위에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면서 마루 아래에 구멍을 내어 물을 긷거나 낚시도 했다고 합니다.

  이 곳을 받치고 있는 많은 기둥들 중에는 각종 양식의 기둥들이 섞여 있고, 메두사 조각상이 뒤집어져 놓여 있는 등 이채로운 점들이 눈에 띄는데, 무너진 사원들의 이 곳 저 곳에서 제각각의 기둥들과 조각상들을 가져다 놓은 탓에(말하자면 재활용을 한 셈이지요.) 그런 모양새가 되었다 합니다.

  천정에선 연중 물이 뚝뚝 떨어지고, 바닥에 고여 있는 물에는 물고기들도 헤엄치며 노닙니다. 제법 큰 잉어들도 있었는데, 이 녀석들이 관광객이 던져주는 먹이의 맛을 아는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스윽 슥 헤엄쳐 몰려옵니다. 

  식수를 비롯하여 유사시 물 공급을 위해 지어진 지하 물 저장고는 유럽과 아시아 양쪽으로부터 언제라도 받을 수 있는 공격의 위험을 안고 있는 이스탄불의 운명을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곳에서 길러지는 물고기들은 혹시라도 적군에 의해 투입된 ‘독’의 여부나 물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 역할을 합니다.

  엇비슷한 기둥들 중 ‘눈물의 기둥’이라는 작은 안내문과 패찰이 붙여진 기둥의 중간쯤에는 사람의 엄지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나머지 네 손가락이 기둥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로 360도 한바퀴를 완전히 돌리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도 돌 하루방의 코처럼 여러 사람이 손길이 닿은 구멍은 꽤나 닳아있었는데, 남들 하는 건 다 따라 해봐야 하는 관광객들은 차례로 줄을 서서 열심히 소원을 비는 동작을 반복했습니다.  

 

시대가 겹겹이 덧칠된 성 소피아    

  성 소피아는 성당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그리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그 이름을 달리해온, 그 자체가 이스탄불의 역사이자 터키의 역사인 그런 곳입니다. 만일 ‘딱’ 한 곳을 골라 ‘터키의 역사’를 보려한다면 바로 이 곳 성 소피아를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성 소피아 성당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터키 공화국 시대에는 박물관으로 바뀌는 등 역사 속에서 ‘소피아’가 겪어온 온갖 풍상은 현재의 소피아 박물관 벽면과 천정 곳곳에 겹겹이 남아있습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덧칠해진 부분도, 그 밑에 숨겨진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성화도, 이 모두가 ‘터키의 역사’이므로, 모자이크 성화의 반 정도만 복원하여 비잔틴과 오스만 양쪽에 양다리를 각각 걸침으로써 어느 한 쪽만을 보존할 수 없는 딜레마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림 39-1 성 소피아.

                          비잔틴 시대의 성당에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사원으로

                          그리고 터키 공화국의 박물관으로 그 이름을 달리해온,

                          파란만장했던 이스탄불의 역사 그자체입니다.

                         (근거리에서 찍은 제 사진들은 성 소피아 전경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지 못해서 부득이하게 tourtotal 웹 사이트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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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9-2.  술탄 아흐멧 사원

                    내부의 신비스런 푸른 모자이크 장식으로 블루 모스크라고도 합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성 소피아 옆에 나란히 세워졌으며,

                     비잔틴 시대의 성당이었던 성 소피아에의 우위를 과시하려

                     더 화려한 외관과 내부 장식으로 치장하였습니다.

 

  정복자’들은 의례 정복지의 ‘과거’를 부정하고 수탈과 파손을 일삼는 자들로 묘사되곤 하지만, 성 소피아 성당의 새로운 정복자들은 파손대신 ‘덧칠’을 선택함으로써 오스만 제국 밑에 비잔틴 제국을 숨겨놓았습니다. 같은 공간 안에 ‘그리스도교’ 성화’와 ‘이슬람’ 경전을 읽는 방이 함께 있는 모습은 소피아의 기구한 역사 그 자체입니다. 

  일부는 ‘오스만’이 덧칠된 채 남아 있고, 또 다른 일부는 ‘비잔틴’의 복원을 위해 벗겨져 있고, 또 한쪽엔 철골 구조물을 설치하여 보수공사 중인 소피아 박물관.

  그 웅장한 돔 밑의 한복판에 서서 천천히 돌아보면, ‘백문이 불여일견’인 듯 ‘터키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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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0.  오스만 제국에 의해 회벽으로 덧칠된 부분을

                            복원하여 드러난 비잔틴 성화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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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1.  성당에서 사원으로 바뀐 소피아 사원 안의 이슬람 경전 읽는 방

 

그랜드 바자르에서의 ‘묻지마 쇼핑’

 ‘성 소피아’에서 짐짓 가슴 뭉클하게 ‘터키의 역사’를 느낀 듯한 여행자들이 이번엔 이스탄불의 명물이자 이슬람 문화를 대변하는 ‘바자르’(Bazzar)에서 ‘쇼핑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른바 ‘묻지마 쇼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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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2 4,400여개의 상점들이 모여 있는 그랜드 바자르의 메인 도로.

  

  ‘시장’이라는 단어 자체가 뭔가 ‘역동적이고 생생한 삶의 현장’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여행지 현지의 재래시장은 개인적으로 제가 무척이나 열광하는 코스 중 하나입니다.  

  터키를 다녀오신 분들로부터 ‘그랜드 바자르’(Grand Bazzar)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시장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기대 지수 100%였습니다.

  터키어로는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듯의 ‘카파르 차르쉬’라고도 하는 이 곳은 생각만큼 딱히 살 것은 없지만 볼 것은 정말 많은 곳입니다.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눈이 즐거우면서도 딱히 살 것은 없어서 지갑이 가벼워지지 않는 곳, 저는 이런 곳을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워낙 많아서 한번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 ‘관성’이 붙을 수도 있으니 스스로 자제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우리 일행끼리도 “내가 과소비하는 것 같으면 옆에서 좀 말려줘”하고 농담 삼아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살던 곳이 아닌 곳은 어디나 조금씩은 이색적이지만, ‘이스탄불’은 정말로 ‘이국적’이라는 단어 그 자체인 곳입니다. 특히 그랜드 바자르는 제가 다녀본 그 어떤 시장보다도 독특한 시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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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3 바자르 내의 화려한 문양의 그릇 가게.

             바자르 내에는 이런 가게들이 수천개나 되어서 여행자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메인 도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지네 다리처럼 뻗어있는 골목 골목마다 4,400여개의 작은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저마다 손님을 부르고, 지붕이 있어서 비를 맞을 일도 바람을 맞을 일도 없는 여유로움과 편안함으로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다보면 길을 잃기 쉽고,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가는 일도 만만치 않은 곳이 바로 그랜드 바자르입니다.

  혹시나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상점마다 부여되어 있는 번호를 확인해가며 방향감각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미처 눈에 다 새겨두지도 못할 정도로 쌓여있는 이국적인 물건들을 둘러보고 나니, 과식이라도 한 듯 숨이 가쁩니다.

  터키인들이 워낙 한국인을 좋아하는데다 2002 월드컵 이후 한국 관광객이 많이 늘어서인지, 시장 상인들의 한국어 실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사모님~ 사모님~ 여기요~. 싸요~ 싸요~”

사모님 소리에 반응이 없으니 놀랍게도 ‘언니~’라 합니다.  

비싸다는 표정을 지으니 “비싸? 안 비싸~ good price ! " 하다가는 돌아서려는 사람 붙잡고 ”얼마?“ 하며 계산기를 내밉니다. 계산기에 원하는 가격을 찍으니 ” 마담, No, good price"했다가는 “Thanks anyway"하며 별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사람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Lady, Lady 하며 가능한 가격을 계산기에 찍어 보여줍니다.

  터키어, 영어, 한국어, 이렇게 무려 3개 국어로 이리 저리 가격을 밀고 당기며 부산하게 흥정하자면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어느 한 사람 짜증내는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팔아도 즐겁고 안 팔아도 즐거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정찰제’를 선호하는 저는 남대문 시장과도 닮아있는 바자르식 흥정에 쉽게 지칩니다. 나중엔 아무리 주인이 “Last price!"를 외쳐도 ”Really?" 라는 댓구가 절로 나오며 진짜 가격이 궁금해지기만 합니다.

  쇼핑을 마치고 시장을 나온 뒤 하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은 바로 ‘가격 비교’입니다. 같은 가게의 같은 물건이라도 흥정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가격이 두 배, 세 배, 그 이상도 차이도 날 수 있는 곳이 그랜드 바자르이므로, 일단 구입 후에는 서로 간에 가격을 묻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래서 ‘묻지마 쇼핑’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은 기어코 상호 가격 확인을 하게 만들고, 그러면 또 희비곡선이 엇갈리며 어느 한쪽에선 열 내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좌우지간 그랜드 바자르 출구에서는 서로 가격을 묻지 말아야 합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쇼핑 품목으로는 가죽 제품과 터키석 정도만 정해놓고 있었던 탓도 있지만, ‘시장’과 ‘상품’이라면 세계 일류 최첨단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살다보니 웬만한 물건은 성에 차지 않습니다. 듣던 대로 터키 공업 제품의 정밀도나 세련미는 한국인의 높은 눈을 맞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여행을 처음 할 때는 꽤나 부피 큰 민예품들도 사곤 했지만, ‘나중엔 다 짐’이라는 생활의 깨달음이 있어 왔기에 ‘눈’에만 담아두는 일이 그리 큰 자제력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달리는 교실(버스)에서의 ‘터키 겉핧기’ 강의

 

 * 괄호 밖은 터키인으로 생활한지 3년 된 가이드의 강의 내용이고,

 괄호 안은 버스타고 터키를 단 몇 일 훓어본 ‘지나가는 이’의 생각과 느낌입니다.  


▶ 터키인과 친해지는 방법 세 가지

 

* 라끄(터키식 소주) 함께 마시기

  ‘라끄’는 일명 ‘사자의 젖’이라고도 불리며 우리나라의 소주와 비슷한 술로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대중적 술입니다. 라끄와 물을 1 : 1로 혼합하여 마시는데, 투명하던 원액이 물과 만나면 하얗게 변합니다. 스트레이트한 맛의 소주와는 다른 특유의 맛과 향이 한국인들의 첫 입맛에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술잔을 부딪치며 마음을 트는 모습은 우리와도 비슷한 정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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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4. 터키인들이 즐겨 마시는 라끄

 

 * 터키 커피 함께 마시기

 터키식 커피는 우리가 흔히 마시는 커피와는 그 맛도 다르고 끓이는 방식도 다릅니다. 많은 물을 끓여서 여러 잔에 나눠 붓는 것이 아니라 한 잔 정도 용량의 전용 포트에 커피가루와 설탕을 함께 넣고 끓여 에스프레소 잔 크기의 컵에 따라 줍니다. 찌꺼기를 거르지 않은 채 주기 때문에 조금 기다렸다 마셔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커피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깨끗한 물로 미리 입가심을 해둡니다.

  예전에는 청혼을 하러 온 청년에게 ‘커피 맛’으로 신부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답니다. 신랑감이 마음에 들면 맛있는 커피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이상한 첨가물 등을 넣어 이상한 맛의 커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만일 이상한 맛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면 묵묵히 커피를 마신 후 쓸쓸히 돌아서야 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집니다.(우아하고도 잔인한 청혼 거절 방법이네요.)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커피 잔을 잔 받침에 엎어 세 번 돌린 후 다시 뒤집어서 잔에 남겨진 커피 찌꺼기의 모양을 모고 ‘커피점’을 치는 풍습이 있는데, 요즘에도 재미삼아 많이들 한다고 합니다. 

 

* 담배 함께 피우기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술 취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기 때문에 술 취하는 것을 경계하는 탓인지 대신에 담배를 많이 피웁니다.

(여행자인 제 눈에도 터키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정말 담배를 많이 피웁니다. 옆자리에 임산부가 앉아 있는데도 사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좀 놀랐습니다. 

우리 사회도 요즘엔 금연 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지만, 서로 간에 서먹한 분위기를 깨고 싶을 때 담배를 건네고 불을 지펴주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지요.

사는 곳은 달라도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지만, “술 한잔 할까요?”, “차 한잔 드실래요?”, “담배 한대 드릴까요?” 이 세 마디는 만국 공통의 친구 만들기 작업용 첫마디인 것 같습니다.)

  터키인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기는 하지만 흡연 금지 구역은 엄연히 있어서 금지 구역 내에서의 흡연에는 2억 8천만 리라(구 터키 화폐 단위. 우리 돈으로는 약 25만원 정도)정도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물과 공중 화장실은 대부분 유료

  여느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터키에서도 물과 화장실이 대부분 유료입니다.

관광지에서 물은 500ml 정도에 50만 리라 ~100만 리라 정도(500원~1,000원), 화장실 이용은 25만 리라~50만 리라(250원~500원) 정도 되는데 화장실을 이용하면 영수증까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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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5. 화장실 입구의 WC라는 단어가 왠지 친숙합니다.

                                       요금은 일반적으로 25만  리라(우리 돈으로 250원) 정도입니다.

 

   (외국 여행을 할 때 익숙하지 않은 것이 바로 식당에서 돈을 내고 물을 사 먹어야 하는 일과 화장실을 이용할 때 돈을 내는 일입니다.

  식당 테이블에 앉기만 하면 자동으로 나오는 물을 대접받던 습관과, 길 가다가도 은행 등이 있는 건물이나 웬만한 건물에 들어가면 화장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데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사먹는 물과 유료 화장실이 좀 이상하고 불편합니다. 우리 돈으로 비싸야 천 원 정도의 돈이지만 거 참 돈이 아깝더군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인 물 마시기와 용변 보는 일에 번번이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좀 너무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터키 곳곳을 누비는 관광버스들

터키의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도 잘 발달되어 있는 것이 ‘버스’입니다. 터키 구석 구석까지 버스 노선이 있으며 그 시설이나 운영도 훌륭한 편입니다. 대개 관광버스에는 운전사외에 승무원이 탑승하여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기도 하고 손님의 불편사항이나 요구 사항에 해당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국토가 넓은 터키의 곳곳을 달리다보면 워낙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 버스들이 많기 때문에 버스 내에서 승객들은 금연을 해야 하지만 운전사만큼은 흡연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터키의 상징, 초승달 모양

터키 국기는 온통 붉은 색 바탕에 흰색 초승달과 별이 각각 하나씩 있어서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터키 국기에 있는 초승달은 국가의 번영된 미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터키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상징입니다. (보름달은 앞으로 기울어질 달이지만 초승달은 앞으로 채워질 달인 것이지요.)

전 국민의 98% 이상이 이슬람교도인 터키에서는 적십자 표시로도 붉은 십자가 표시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터키의 앰뷸런스에는 붉은 십자가 대신 흰 바탕에 붉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

버스를 타고 터키를 달리다보면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처럼 화려한 것은 아니라 해도 가는 곳마다 사원을 상징하는 높은 첨탑을 거느린 사원들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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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6.  마을 공동체마다 있는 이슬람 사원(자미)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이 첨탑은 사원에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 곳’과 ‘메카의 방향을 알려주는 ‘미흐라프’와 더불어 이슬람 사원의 필수 요소입니다. 동네가 큰 곳의 사원일수록 그 개수도 많아집니다.

  요즘엔 확성기로 기도 시간을 알리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예전엔 그 첨탑에 사람이 올라가서 마을 사방에 기도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기도시간을 알려야 할 지역이 넓을수록 첨탑의 개수도 많아지고 그 높이도 높아지게 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며 보았던 마을 사원들의 미나레트는 한 개이거나 두 개정도였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블루 모스크의 경우엔 새로운 술탄이 등극할 때마다 미나레트를 추가로 세워서 한 사원에 시대가 각기 다른 미나레트들을 사방에 거느린 화려한 모스크가 되었습니다.

  이슬람인들은 하루에 다섯 번, 한번에 15분간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립니다.

  대다수 국민이 이슬람인이지만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인터뷰할 때는 독실한 이슬람 신자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채용에 불리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루에 다섯 번이나 기도를 올리려면 회사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신자이긴 한데 그렇게 독실한 신자는 아니고 무늬만 이슬람 신자인 정도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합격 요령이 되기도 합니다.

(아타튀르크에 의해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고 그로 인해 사회가 세속적인 발전을 빠르게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오래도록 터키 정신의 근간을 이뤄온 이슬람 신앙(성)과 생활의(속) 불일치는 터키인들에겐 마음 한구석 불편함으로 자리 잡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슬람인들의 목욕 풍습과 터키탕의 진실

유목민족들은 이 곳 저 곳 이동하며 살아왔기에 자주 씻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왔을 것이고 따라서 씻는 일에 게으를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무슬림들은 코란의 가르침에도 있듯 몸을 청결히 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기도 시간을 알리는 미나레트와 함께 이슬람 사원에 반드시 있는 것이 바로 손을 씻을 수 있는 시설입니다. 사원에 들어가기 전 전신 목욕은 못해도 청결의 상징적 의미로 손을 씻고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사원에 들어섭니다.

  터키에서 목욕탕은 ‘하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터키탕’이라고 불러오던 이름엔 사실 ‘남녀 혼탕’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도 했는데(그래서 터키 여행자들 중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버스 차창으로 우연히 목격한 하맘도 남녀의 구분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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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7. 이스탄불 거리의 한 하맘(터키 목욕탕)의 입구.  남탕과 여탕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에페소의 유적지에 있던 공중 화장실이 남성 전용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맘’ 역시 사실은 남성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외국 관광객들이 많아짐에 따라 외국인 여성도 출입할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하맘에는 우리나라 목욕탕처럼 때를 밀어주는 때밀이도 있는데 여자 때밀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 남자 때밀이이며, 여성 고객도 남성 때밀이가 때를 밀어줍니다.(가릴 곳은 가리고 알아서 밀어준다는데 저로선 상상하기가 참 어렵네요.)

  터키의 목욕탕엔 사실 ‘탕’이 없습니다. 따끈하게 데워진 대리석 위에 엎드려서 땀을 뺀 후 간단히 몸을 씻는 것이 터키식 목욕인데(우리나라의 찜질방과도 비슷한 풍경), 우리처럼 샤워기 틀어놓고 솨아아 시원하게 씻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물을 받아서 끼얹으며 간단히 헹구는 식입니다.

  이슬람인들은 고여 있는 물은 ‘썪은 물’로 여기기 때문에 탕에 물을 받아놓고 그 물로 몸을 씻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도 반드시 흐르는 물로 손을 씻으며 ‘흐르는 물’의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그냥 고개를 든 채로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씻기 때문에 물이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기까지 합니다. 

  

▶터키의 올리브

  터키에도 그리스에도 올리브 나무는 참 많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이 올리브 나무들만이 이어지는 곳도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 아니면 오렌지 나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리와 들판에는 올리브 나무 천지입니다. 겨울이라도 터키와 그리스의 올리브 나무와 오렌지 나무는 그 푸르름을 잃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이 대추나 말린 대추를 먹는 것처럼 터키인들도 올리브를 먹습니다.

(하지만 염장한 올리브 열매는 정말이지 너무 짜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경험삼아 하나정도 먹어보고는 다시는 올리브에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올리브 나무가 많은 만큼 올리브유와 올리브 비누도 많이 생산되어 주요 수출 품목이 되고 있습니다.          

(친환경이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 유기농 식품에 관심이 많이 쏠리고 있는데, 사실 터키를 비롯하여 올리브 오일을 생산하는 나라들 쪽은 화학 농업이 성한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를 키우는 과정과 착유 과정, 기타 가공 과정 등이 친환경적인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따져봐야 하는 소비자는 머리가 아픕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때 우리 나라 아나운서 중 한 사람이 월계관을 월계수 잎으로 만든 것이라 말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어서 이제는 알만한 사람은 아는 상식이지만, 월계관은 월계수가 아닌 올리브 나뭇가지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 큰 아이도 길거리에 떨어진 올리브 가지를 주워 - 절대 생가지를 꺾지 못하게 하는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 월계관 모양으로 관을 만들어 승리의 여신 니케(나이키)라도 된 양 한껏 기분을 내었습니다. 

  이라크에 파병된 우리 부대의 이름인 ‘자이툰’은 바로 터키어로 올리브(Zeitin)라는 뜻입니다. (이제야 어째서 길거리 노점이나 면세점의 올리브 관련 상품에 우리에게 익숙한 Olive가 아닌 낯선 단어 Zeitin이 쓰여 있었는지 알겠습니다.)

  올리브 잎은 비둘기와 함께 평화를 상징합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노아가 두 번째로 비둘기를 날려 보냈을 때 비둘기가 물고 돌아온 것이 바로 올리브 나뭇가지였지요. 첫 번에 날려 보냈을 때는 그냥 다시 돌아와서 아직도 육지가 드러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고, 두 번째 날려 보냈을 때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고 와서 나무가 물 위로 드러나는 정도로 물이 빠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세 번째 날려 보냈을 때는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드디어 육지(희망)가 드러났음을 알 수 있었다는 성경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문명의 발상지 터키

  문명의 발상지로 이집트나 인도는 쉽게 떠올리면서도 ‘터키’를 ‘문명의 발상지’로 떠올리지 못하는 분들도 많지만, 터키는 엄연히 문명의 발상지였던 지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4지 선다형에서 문명의 발상지로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은 잘 고를 수 있으면서도 정작 이 강들이 지금의 터키 동부를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페르시아, 바그다드와 같은 단어에서 느껴지는 멀고도 아련함, 시리아, 레바논, 그리스 등 신화나 역사책 속에서만 접해볼 수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 느낌. 이란, 이라크 등에서 느껴지는 척박한 자연과 혹독한 전쟁의 땅이라는 느낌. 이처럼 ‘머나먼 이국’으로만 느껴지는 터키를 한국인들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였고, 동서 문명의 교차점이기도 했던 터키는 일생에 한 번 꼭 가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이번 여행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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