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명중 160등을 한 우리 아이.(The Late Bloomer) 2001-09-2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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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큰 아이는 2.3kg중의 저체중아로 태어났습니다.

처음에 아이를 안았을 때
너무나 여리고 가냘픈 아이가 꼼지락 거리는 모습에
'사랑스러움'보다는 '안스러움'이 앞섰습니다.

육아에 대한 사전 정보나 지식이 별로 없었던 저는
이책 저책 육아책을 뒤지며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하는
메뉴얼형 엄마였습니다.

메뉴얼형 엄마의 위험성 중 한가지는
아이 자신보다는 정해진( 예로 주어진) 육아단계에 아이를 맞추려 한다는 점입니다.

아이를
무한대의 '사랑'을 주어야할 대상이기보다는
잘키워내야하는 '의무'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이가 이쯤이면 무엇이든지 입에 넣고 빨면서 감각을 키우고 탐구한다는데

도대체 pacifier조차 입에 물려 하지 않고
거의 입에 넣고 빠는 것이라곤 없는 아이의 비정상(?)에 안달하며

싫어하는 pacifier를 자꾸 입에 물려주려하던 것은

메뉴얼형 엄마의 웃지못할 에피소드 중의 한가지에 불과합니다.

아이가 아픈 것이 가장 두려워 늘
'아이 질병 대백과'를 탐독하며

거기 쓰여 있는 증세를 아이의 상태에 이리 저리 맞추어 가며
항상 '아이가 지금 어디가 아픈게 아닐까?'
하고 전전 긍긍하며 조금만 이상해도 병원문이 닳도록 들락거렸습니다.
마침내 의사 선생님께서
" 애기 엄마! 이제 그만와!" 하셨습니다.

우리 아이는 항상
육아책에 쓰여있는 발달 단계 시기의 가장 마지막 시기가 되어서야 그 발달 단계의 시기에 다다랐습니다.

3~4개월이면 머리를 가눈다는데-요즘 아이들은 무척 빨라서 이보다 훨씬 전에 머리를 가누곤 합니다-
3개월이 지나도 머리가 건들거리는 아이를 보며 시댁 어른들이

" 얘가 왜이러냐? 병원 가봐라."하시면

저는 또 죄인된 심정으로 아이가 왜 머리를 못가눌까?하고 자꾸 관찰하며 머리 가누기 연습(?)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는 4개월이 끝나갈 무렵 머리를 겨우 가누었습니다.

5~6개월이면 뒤집는다고 하는데 6개월이 되어서도 뒤집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 '뒤집기 연습'을 시키곤 했습니다.
( 저의 그 때 모습을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아이는 6개월이 끝나갈 무렵 첫 뒤집기를 하였습니다.

늘 불순한(?) 의도로 아이를 관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저는
첫 뒤집기를 시도하려는 아이의 기미를 놓치지 않고
그 전과정을 담으려고 카메라 셔터를 불이나게 눌러댔습니다.

아이 키우기 경력이 6개월 정도 되자
아이는 육아책에 쓰여있는 대로 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페이스가 있음을 서서히 깨달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 이미 알고 있어야 할 것을
너무나 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그제라도 깨달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완수해야할 '임무'에서 그저 엄마의 '기쁨' 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이가 돌이 지나도 스스로 못 걸어 조금 걱정을 하던 날들이
지나면서 '아이의 걷기'에 대해 잊고 있던 어느 날
(우리 아이는 걷기 전의 어설픈 동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던 아이가
부엌에서 마늘을 까고 있던 엄마에게
' 쿵쿵쿵'
걸어왔습니다.

" 허! "
제 눈으로 아이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옹알이도 별로 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말을 하기 전의 아이들이 보통 하는
엄마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자꾸 지껄이는
' 말하기 연습' 과정도 보이지 않았던
우리 아이는

어느 날 부터인가 처음부터 확실한 발음으로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둘째가 잘 보는
'Leo, The Late Bloomer' 라는 비디오를 보면

늦되는 호랑이 레오와 레오를 지켜보는 아빠 호랑이, 엄마 호랑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바심이 난 아빠 호랑이가
" What's the matter with Leo?" 하며 걱정할 때

엄마호랑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Nothing"

그러자 아빠 호랑이도
" Better late than never"
하고 스스로를 위로면서도

언제 레오가 말하고, 쓰고 , 그림도 그리게 될지 계속 지켜보고 있자, 엄마호랑이가 조용히 말합니다.

" A WATCHED BLOOMER DOESN'T BLOOM"

드디어 때가 되어( In his own good time)
레오는 그림도 그리고 쓰기도 하고 말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한 문장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 I made it."

저는 이 비디오를 보며
저의 우습고도 슬픈 과거가 생각나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혼자 웃었습니다.

아이가 무엇이든지 보통 아이들보다 빨리 , 그리고 탁월하게 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부모는 없겠지만
그저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것 보다 더 중요 한 것은 없을겁니다.

어제는 아주 감동적인 날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주체하지 못할 감동의 순간을 여러번 겪게 되지만
어제도 그랬습니다.

요즘 아이의 학교에서 스케이트 수업이 있었습니다.

수업 마지막 날 급수측정까지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수업을 받기 시작하기전에 미리 배우고 오는 경우가 많다고 듣긴 했지만

저는 원칙적으로 대개의 경우,수업의 시작은 '학교'여야 한다고
믿고 있어서 스케이트 신발조차 신어 본 적이 없는 아이를 데리고 아이스 링크로 갔습니다.

이미 선수같은 폼으로 얼음을 지치고 다니는 친구들의 모습에
아이는 좀 기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해보지 않은 스케이트에 대해
처음하는 자기와 이미 배운 친구들의 실력격차가 그리 크지 않을거라는 희망을 가진 아이는

생전 처음 신는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으로 용감하게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고 서있는 것조차 힘이드는 자신과 아이들을
비교하며 아이는 '좌절'을 맛본 것 같았습니다.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학년 전체 어린이 160명중 기초반은 딱 6명뿐이었습니다.

그 중 강습을 전혀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가 4명,
그 중 넘어지지 않고 서있기도 힘든 아이가 두명이었습니다.
(이중 한 아이가 우리 아이입니다)

기초반 중에서도 턱없이 실력차가 나는 그 두 아이에겐 지도 교사 선생님의 지도의 손길도 자주 오지 못했습니다.

무릎 굽히고 워킹하기 연습을 지시하시고 다른 아이들을 지도하시는 사이
우리 아이와 또 한 아이는 전의를 상실한 채
쉬익 쉭 소리나게 지나가는 다른 아이들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속에서라도 엄마는 자기 아이를 쉽게 찾는 법이지요.
여러 반의 여러 아이들이 뒤엉켜 연습하는 혼잡스런 커다란 링크안에서 망연히 서있는 우리 아이의 모습이 제 눈에 아프게 박혔습니다.

그냥 서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첫날 연습이 끝나고
엄마가 있는 곳까지 혼자 오지도 못해서 선생님께서 안고 들어오신
우리 아이는

저를 보자 얼핏 눈물이 어릿해지더니 저를 꽈악 끌어안았습니다.

저는 그저 아이를 꼬옥 안아주기만 하였습니다.

이틀간은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3일째부터는 오라고 되어있는 시간보다 일찍 링크에 도착하여
아이들이 거의 없는 링크에 아이를 들여보냈습니다.

아이는 스케이트를 타는 연습이라기보다 안 넘어지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도 이젠 처음처럼 그리 자주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4일째 되던 날.

아이의 연습을 지켜보던 한순간
' 아! 저녀석이 이제 감을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제쪽을 보며 앞니 빠진 입을 헤벌리고 '씨익' 웃었습니다.

아이의 '기쁨'의 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아이의 그 '희열'을
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아이는 연습에 열심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하라고 하는 연습횟수보다 항상 더 많이 연습하고
지도 순서를 기다리고 서있는 동안에도 계속 혼자 연습했습니다.

'그래,
아이에게도 '희망'이라는 것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어야 했었구나'

하지만 우리 아이가 아무리 연습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몇달씩 배운 아이만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스케이트를 제대로 폼잡고 탄다는 것이 그렇게 며칠내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다른 아이와 비교한다면 아이가 실망할만도 했을텐데
아이는 어제보다 오늘 더 잘타게 되었다는 것에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빙상 수업 마지막 날에는 시합을 통한 급수 측정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아이는 도저히 시합이라는것을 할만한 단계가 아니어서
시합 없이 최하위 급수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첫번째 아이들의 시합이 있고
두번째 아이들이 스타트 라인에 서 있는데

제일 끝에 우리 아이가 서있었습니다.

저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총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이 출발했습니다.

아이들이 이미 4분의 일 바퀴를 돌 즈음
아직도 스타트 라인에서 많이 못 벗어난 우리 아이가
어설픈 폼으로 느릿 느릿 오고 있었습니다.

그 어설픈 폼에 관중석의 엄마들과 링크내의 아이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습니다.

지도 선생님께서 응원차 아이 앞에서 뒤로 가시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습니다.

아무리 제가 엄마지만 아이의 엉성한 폼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우리 아이에게 쏟아지는 웃음이 너무 무안해서
저도 그냥 따라 웃었습니다.

첫번째 시합하던 아이들 중 너무 실력차가 나는 아이가 중간에 포기하는것을 본 저는
우리 아이가 포기하더라도
"그래도 끝까지 돌아야지" 하고 말할 용기는 차마 없을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이미 다 돌고난 트랙을 아이는 계속 돌았습니다

56초나 걸린 그 시간은 참 길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엄마들을 따라 그냥 웃으며 아이를 안스럽게 보던 저는
아이가 3분의 2지점을 통과할 무렵부터
흔히 영화에서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할 때 보이는 것처럼
배경 소리가 들리지 않고 아이의 동작 하나 하나가 슬로우 모션 처럼 제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무안해서 남들처럼 웃고 있던 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장엄한 감격스러움에
목구멍이 아파오고
고인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게 하려고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이는 다 돌고 나서 제쪽을 쳐다보며
백만불짜리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가장 빠른 아이가 15초 걸려 돈 트랙을 아이는 56초만에 들어왔습니다.

160명중 160등의 기록이었습니다.

급수 측정이 끝나고 흩어져 들어오는 아이들 속에서 우리 아이가
"엄마~"
하고 소리지르며 어기적 어기적 얼음을 밀며 왔습니다.

" 엄마, 너무 재밌어. 나, 세바퀴만 더 돌고 올게"

하더니 선생님들께서 모두 나가라고 재촉하시는데도
아이는 선생님 눈치를 봐가며 세바퀴를 더 돌고
아쉬운 표정으로 들어와서는

" 엄마, 나 스케이트 더 배울래" 하였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한 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멋있었어! 넌 진정한 인생 공부를 한거야"

제가 더 보태서 할 말이 없어서
아이와 얼굴 맞대고 함께 "씨익"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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