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을 좋아하니?" 2002-02-1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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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월)

"등록기간이 언제야?"

남편이 묻습니다.
아... 맞다... 등록을 해야지...

"몰라."

남편은 얼핏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습니다. 아... 저도 이렇게 정신없는 제 모습이 싫습니다. 하지만, 아이 둘을 끼고 있자니 사실 그럴 수밖에 없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사람인데...

이제 대학원 4학기 째인데, 1년 정도 휴학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윤형이도 이제 막 두 돌 지낸 아기인데, 도저히 둘을 데리고 공부하기는 어렵겠더군요. 친정 어머니께 둘을 다 맡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직 어린 큰 애를 어디 맡길만한 데도 없구요.

마침 장학금을 타는 것이 있어서 그 돈으로 등록하고 휴학을 하려 마음만 먹고는 설렁설렁 그렇게 날짜만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남편 말 듣고 아차 싶어 고지서를 확인하니 1차 등록기간은 진작에 끝났더군요. 과 사무실에 전화해보니 이번 주중에 있는 추가등록기간에 등록하고 휴학계를 내랍니다. 이제 내일 학교 나가서 정식으로 교수님들께 인사드리고 등록하고 휴학계 낼 참입니다.

이런 저런 사정 이야기하느라 대학원 동기인 가장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내일 학교 가니 얼굴이나 보자고... 그랬더니 오늘 오랍니다. 석사과정 마친 선배언니가 진작부터 유학준비를 해왔는데, 이제 나가는 날 잡았다고... 오늘 그 언니를 보기로 했답니다. 이렇게 훌쩍 나가버리면 언제 다시 볼지 기약할 수 없기에 윤형이 데리고 나갔습니다. 전화 통화한 언니 자취방에서 보기로 했죠.

학교 후문에 있는 자취방에 도착했건만 윤형이가 영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 마침 학교에 와있는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 윤형이를 떠넘기고 저만 훌훌 들어갔습니다. 진작 그럴 것을...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대하고 백포도주도 한잔 기울였습니다. 알코올에 아주아주 취약한 저는 금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몽롱하게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음... 그 중 아줌마는 저 혼자였는데, 누가 애 엄마 아니랄까봐 윤형이 이야기가 또 한동안 술술 풀렸습니다. 되도록 자식 얘기, 남편 얘기하지 않으려 하지만, 언젠가는 꼭 튀어나오대요. 어쨌든 주책없이 또 그렇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다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는 언니들 앞에 툭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윤형이 이제 영어 잘한다!"

사실, 윤형이 영어가 요즘 눈에 띄게 늘고 있거든요. 우리말 속도보다야 더디지만, 단어만 두 세 개 연결해 말하던 것에서 요즘은 제 딴에 짧은 문장을 만들어 말하려고 무진 노력을 합니다. 제법 완벽하게 표현하는 문장도 더러 있구요.

영어든 우리말이든 늘어가는 아이의 말이 요즘은 제게 가장 큰 행복이라 결국 미혼인 언니들 앞에서 은근히 자식자랑을 하고 말았습니다.

출국을 앞둔 언니가 바로 받아치더군요.

"너 순전히 영어만 시키는구나?"

조금은 질책을 받는듯한 기분도 들대요. 이 물음에 제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아~냐~"

세상에... 바보같이 극구 부인을 했습니다. 사실, '순전히'는 아니어도 전 주로 영어를 했는데... 하지만, 아이에게 시켰다가 보다는 그냥 아이 듣는데서 주절거렸을 뿐이지요.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왜 그렇게까지 펄쩍 뛰며 부인을 했는지... 부정을 하면서도 머리 속이 복잡했습니다. 아니지, 그냥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닌데...

찜찜했습니다.

그러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화제는 자연스레 미국 테러 참사 건으로 넘어갔습니다.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Daum에 미국 테러 사건에 대한 토론방이 있길래 들어가봤다. 거기 올려진 글 죽 읽어봤는데, 대부분 사람들 글은 그런 대로 균형이 잡혀 있었어. 이를테면,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자비한 테러는 당연히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미국도 그 동안 잘한 것은 없다는 식이지. 그런데 어린애들 반응은 당혹스럽더라. 주로 중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애들인데, 두말 않고 자기는 미국이 좋대. 선망의 나라래. 그런 나라가 피해를 입어서 너무 슬프대."
"다 어른들이 그런 환상을 심어줬던 거야. 어른들 책임이지."
"맞아."
"미국 좋아하고, 영어 좋아하고... 사대주의의 표본이지. 옛날엔 중국이었다면 이제는 미국이야. 대상만 바뀐거야."

이 대목에서도 당혹스러웠습니다. 유아영어를 실천하고 있는 입장에서 영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마침 일어서야 하는 때였던 데다 이제 멀리 타국으로 가게 될 언니를 두고 일장 연설을 할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얼버무리고 자리를 마감했습니다.

더 찜찜했습니다.

약속된 시각에 일어나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며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까 그 언니의 말에 난 어떻게 답을 해야 했을까... 내가 아이에게 영어를 접하게 해주는 것에 어떤 의미를 둔다고 전해줄 수 있었을까...

그러다 문득 제게 이렇게 자문해보았습니다.
"넌 미국을 좋아하니? 영어를 좋아하니?"

글쎄... 난 미국은 좋아하지 않아. 배울 점도 많지만, 참 오만한 나라이니까... 영어? 영어는 좋아하는 편이지. 확실히 학교 다닐 때도 아주 잘하진 못했어도 멀리하진 않았으니까...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영어를 좋아하면 미국도 좋아하는 건가? 난 아닌데...

음... 이제 답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언니가 갑자기 왜 미국와 영어를 싸잡아 이야기하며 발끈했는지... 눈치채셨겠죠? 영어는 미국어라고 생각한 거죠. 전 바로 그 점을 반박했어야 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공용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은 영어를 배우려 안달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식 영어에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는 우리에게 외국어일 뿐이지요. 미국의 영향력이 아무리 클지언정, 그래서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할지언정, 우리는 영어를 미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대하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쑥쑥의 모든 엄마들은 유아영어 교육의 선봉에 서있는 개척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 전에도 유아영어를 실천하신 분들은 알게 모르게 많이 계셨지만, 지금처럼 유아영어가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오른 적은 없었지요. 유아영어 실천을 통해 소정의 성과를 거둔 분들을 쑥쑥에서 속속 만나 뵐 수는 있지만, 사실 실질적인 성과를 알기 위해서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길이 제대로 나지 않은 유아영어의 방법을 찾아 손을 잡고 앞으로 한발짝씩 나가고 있는 셈이고, 그런 와중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에 불안해 하며 때로는 분에 넘치는 출혈 투자도 서슴치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런 초보 엄마 중 한 명이구요. 사실, 시간이 흘러 우리의 노력이 빛을 발하게 될 즈음에는 우리의 방법들은 비단 영어 뿐만 아니라 모든 외국어에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유아영어가 아닌 유아외국어 교육의 성공사례가 되는 것이지요.

어쨌든 그런 시행착오 속에서 우리는 우리말보다는 영어를 더 우선 생각하는, 말 그대로 극성 엄마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어는 그저 외국어일 뿐이며 우리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이 있다는 점입니다. 단지 몇 살에 한글을 깨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들려줄 것인가, 가르쳐 줄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지요.

영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우리말과 글을 들먹이는 것이 참으로 두서없이 보이지만, 둘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현대사회에서 한편으로는 세계화(globalization)을 부르짖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화(localization)가 강조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이를테면, 인터넷으로 세계가 하나로 묶이고,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로 말 그대로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런 와중에 민족이니 문화니 하는 단어가 새삼 강조되는 것이 그 실례입니다.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 하는 것도 일면 그런 의미가 숨어있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려 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혹시 '미국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는 시간도 가지려 합니다. 행여 그렇다면 왜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제가 다루기에는 참 무거운 주제입니다만,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무역센터와 무자비한 테러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쟁선포로 맞서고 있는 미국을 보고 있자니 이 즈음에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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