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가 있어 기다려지는 수요일 2003-10-0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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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10/06



일요일 밤, 승호 침대에 저와 승호가 나란히 누웠습니다.

아직까지 옆에 엄마가 없으면 잠을 자려 하지 않는 승호 옆에 제가 누워있었습니다. 승호엄마가 옆에 누울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승호는 엄마가 옆에 오기 전에는 안 자겠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엄마가 올 때까지 아빠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라 하고 있었죠. 결국은 그러다가 승호는 잠이 들었지만요.



승호가 잠들기 전에, 문득 내일이 월요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회사 나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지더군요. 그래서, 승호에게 물었습니다.

"승호야.. 내일 월요일인데 너도 월요일이 싫니?"

"응.."

질문을 싫으냐고 물었으니 대답도 그리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월요일이 싫다고 합니다.

"그럼, 무슨 요일이 제일로 좋아?"

"응, 수요일하고 토요일"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대답으로 나올 줄은 알았으나 수요일이 포함될 줄은 예상을 못 했는지라 저는 이유도 물었습니다. 먼저, 토요일이 좋은 이유는 토요일에는 어린이집에 가도 되고, 안 가도 되어서 좋답니다. 아빠가 집에 있으면 아빠랑 놀 수 있어서 좋고, 아빠가 없으면 어린이집에가서 친구들이랑 놀 수 있어서 좋답니다. 거 참, 아빠가 물었다고 눈치있게 아빠와만 관련지어서 대답을 합니다.



수요일이 좋은 첫 번째 이유는 2주전부터 친구 한 명과 어린이집 끝나고 오후에 인라인 스케이트 강습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인라인이 좋은지 아니면 친구랑 노는 것이 좋은지 분명하지는 않은데 하여간 친구랑 함께 인라인을 배우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이야기한 두 번째 이유는 저를 좀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받아쓰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승호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내년에 학교에 가는 7살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해주자는 취지하에 한글 받아쓰기를 2학기때부터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글을 본격적으로 어린이집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마다 한글 실력의 편차가 심하고 또 어린이집이다보니 유치원처럼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은 준비되어 있지 않거든요. 받아쓰기 자체도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뤄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승호가 그러기를 선생님도 이건 연습이니까 괜찮은데 학교가서는 잘 해야된다 하는 식으로 말씀하신대요.



문제는 아직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승호가 이러한 받아쓰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또, 그 과정에서 부모인 저와 승호엄마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았죠. 우선 그 동안 받아온 승호의 받아쓰기 점수를 살펴볼까요?



처음에는 60점을 받아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그 정도면 잘 했다고 생각했죠.

다음에는 70점을 받아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고무가 되어 승호에게 '그런 식으로 점점 점수가 오르면 곧 100점 되겠네' 하고 바람을 집어넣었죠. 그런데, 그런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그 후 승호는 거꾸로 50점을 받아오더니 최근에는 급기야 20점, 30점을 받아오기에 이르렀습니다.



무슨 문제가 나왔나 물어보면 승호가 잘 기억은 못하는데 띄엄띄엄 이야기하는 단어들의 수준이 승호가 쉽게 쓸 수 있는 것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잘 읽지도 못하는 글자들을 써야한다는 이야기죠. 아무튼 처음에는 별 말이 없던 승호엄마가 먼저 불안감을 드러냈습니다. 20, 30점이면 거의 반에서 꼴지 수준이라고 할 수 있으니 충격을 좀 먹은 듯 합니다.



승호를 앉혀놓고 20점 받으니까 기분이 어떻냐 하는 식으로 승호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더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승호의 답을 이끌어냅니다. 저에게는 20점을 받고서도 그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승호의 태도가 더 문제라고 이야기하구요. 그냥 일정 시점에 선생님을 붙여서 확 끝냈어야 했다는 의견도 이야기하더군요. 승호에게 '한글 가르치는 선생님에게서 배울래?' 하고 물어보았더니 승호가 그러고 싶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승호엄마 말로는 승호가 친구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한글을 익힌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진짜로 원하는지도 모른다고 해석하더군요.



받아쓰기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데 그 날만 되면 저녁 때 승호는 오늘 나왔던 문제를 기억해내느라 애씁니다. 승호엄마가 물어보거든요. 그리고, 엄마와 함께 좀 더 쉬운 문제로 받아쓰기를 해보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효과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어떤 날은 집에 와보니 식탁이니 TV이니 이런 곳들에 명찰이 붙어있었습니다. 승호보다 어린 아이들이 한글을 익힐 때 또는 영어를 익힐 때 흔히 쓴다는 그 방법입니다. 그리고는 그 글자들을 잘 익혔는지 받아쓰기를 했습니다. 어린이집과는 달리 미리 문제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목표는 100점이었죠. 100점을 맞으면 승호가 원하는 만화 비디오 시청이 상으로 약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승호는 처음에 100점을 받지 못했고 두 번째 도전에서야 겨우 100점을 받고 비디오를 볼 수 있었죠.



이와 같이 받아쓰기 때문에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인지라, 받아쓰기 때문에 수요일이 좋다는 승호의 대답은 저를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승호가 덧붙인 설명은 이러합니다.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글자를 받아쓰는 행위와 분위기가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제가 그 현장에 가 보질 못해서 모르겠으나 아마도 문제가 나오면 개구쟁이들끼리 눈짓을 하며 낄낄거리며 글자를 쓰지 않나 싶습니다. 즉, 시험을 보는 강압적 분위기가 아니라 노는 분위기라는 것이죠. 받아쓰기 놀이 말입니다. 또 하는 말이 점수가 너무 높이 나오면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낮은 점수가 나올수록 재미있다는 거죠. 그래야, 다음에는 더 높은 점수를 받기가 쉽구요. 이거 참.. 부모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받아쓰기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안 그런 아빠들도 많이 생겼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아빠들은 엄마가 아이 교육 때문에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걱정마라', '그냥 둬라' 하는 식으로 아무 대책없는 대답들을 내뱉곤 합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책임 소재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사회는 아직도 아이 교육의 책임을 전적으로 엄마에게 묻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왜 아이가 공부를 못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 아빠들 입에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 있잖아요. "집에서 어떻게 가르쳤길래 애가 저래?" 바로 이런 말이요. 아빠들은 아이 교육에 대해 책임을 지지않아도 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쉽게 쉽게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런 아빠가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승호 한글 걱정말라고 늘 이야기만 했지, 별 다른 노력을 보여주지 못 했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받아쓰기가 시작되었고 우리 승호는 예상대로 좋지 않은 점수를 받아왔던 것입니다. 당연히 승호엄마는 불안해지기 시작했구요. 그래서, 전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승호 한글은 내가 책임질테니, 걱정 마시라."

이렇게 승호엄마에게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택한 방법은 아이들용 수수께끼 책을 한 권 택해 매일 2-3개의 수수께끼 문제를 승호가 직접 읽게 하고 답을 맞추는 놀이를 시작한 것입니다. 간단한 수수께끼이다 보니 문장이 길지 않고 또 답을 맞추는 재미가 있어 승호도 좋아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 승호 한글 실력이 나날이 향상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읽을 줄 아는 글자가 한자라도 더 늘어난 것을 알 수 있거든요. 수수께끼 놀이가 끝나고 나면, 예전처럼 저나 승호엄마가 2-3권의 그림책을 읽어줍니다. 그 때가 되면 승호는 글자에 신경쓰지 않고 느긋하게 이야기와 그림을 즐기지요.



예전에 글자를 잘 아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 적이 있었는데 재미가 없더군요. 제가 읽어주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가 글을 읽으려 하고, 그림은 잘 안 보는 등, 읽어주는 제가 몹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 반해 승호는 아주 잘 받아들이지요. 다 읽고 나면 '한 권 더!'를 외치는 승호의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구요.



하지만, 승호엄마는 그런 제가 아직 못 미더운지 승호의 받아쓰기 연습을 계속하더군요. 물론 처음처럼 스트레스 주면서 하지는 않지만요. 사실 제가 끝까지 승호 한글을 책임지리라는 믿음을 주지 못 한 것이 그 원인이 되겠지요. 한편으로는 뭔가를 위해 조직적으로 노력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승호엄마의 말도 맞다는 생각이 들어 저 역시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답니다.



승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3주 동안 우주에 대해 공부하기 때문에 받아쓰기도 우주에 대한 단어들로 치루고 있다면서 저번에 본 첫 시험에서는 자기가 50점을 받았지만 앞으로 두 번 남은 시험에서는 80점, 100점을 받겠다고 다짐을 하더이다. 뭐 비장한 표정이 아니라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한 말이라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아이 나름대로 목표를 가지고 대하는 자세는 칭찬해줄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받아쓰기를 즐기는 것도 다행이구요. 아마도 승호는 지금 시험도 놀이로 생각하고 대할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로서 아이가 그러한 시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지원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구요, 저는 믿고 있거든요. 승호가 6살 때, 그리고 요전에도 했던 말이요.

"아빠.. 난 초등학교 들어가기 바로 전에 한글을 다 배울거야."



어렸을 때부터 글자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던 승호.

이런 승호를 키우면서 부모로서 겪게되는 갈등들.

참, 부모 노릇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또 해봅니다.



(승호는 1997년 3월생 남자아이로 2001년 9월초부터 집에서 영어를 접하게 되었으나, 2002년 들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배우는 것 외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덧붙임) 9월 18일 아침, 승호가 회사로 전화를 했습니다. 승호가 저에게 전화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전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승호는 약간은 흥분된 목소리로 "아빠, 나 이빨 흔들려.." 하고 말했습니다. 승호는 그 동안 이빨이 빠지기를 기다려왔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벌써 이빨이 빠지고 새로운 이빨이 나왔는데 자기만 아직 이가 흔들리지도 않는다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해왔거든요. 그 때마다 승호 엄마는 이빨이 날때도 늦게 나왔기 때문에 빠지는 것도 늦는거다 하고 안심을 시켜주었지만 당사자는 그래도 걱정이 되었나봅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이빨이 흔들린다고 하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물어보았더니 아래 앞 이빨이 흔들린다고 하더군요. 그날 퇴근해서 당장 이를 흔들어보았죠.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더군요. 그걸 발견해냈다니... 이빨 빼는 것과 관계된 그림책(우리글, 영어로 쓰여진 것 모두 포함해서)을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니까 추억으로 남겨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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