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신 박도마가 될 뻔 하다. 2003-12-09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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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12/9

나른한 지난 일요일 오후 1시경...
승호는 안 놀아준다며 투덜거리면서 자동차를 굴리고 있고, 저는 TV에서 하는 영화 관련 프로그램을 소파에 누워 보고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가정의 일요일 오후 모습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승호엄마는? 다른 일요일 같으면 우리 가족이 먹을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 날 만은 예외였습니다. 시각을 다투는 급한 일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아 시름을 하고 있었죠.

일요일에는 보통 온 식구가 늦잠을 자기 때문에 아침은 아주 간단히 먹습니다. 빵을 한 조각 구워먹던가 떡을 먹던가 그러지요. 그러고 나서 점심을 제대로 먹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승호엄마가 아침부터 직무유기(?)를 하는 바람에 승호랑 제가 아침 식사를 굶었습니다. 별로 배 안 고프다며 돌아다니던 승호가 갑자기 배고픔을 호소한 것이 아마 10시 반 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승호는 아주 맛있게 만들어주지 않는 이상 빵을 잘 먹지 않습니다. 격식을 차린 한식을 좋아하는 편이지요.

방에서 승호의 배고프다는 소리를 들은 승호엄마가 저에게 SOS를 요청했습니다.
"거기 냉장고에 자장 소스 있는데.."
얼마 전에 자장면시켜 먹었을 때 남은 소스인가 봅니다.
냉장고를 열어 보았더니 과연 소스가 있고 밥 두 그릇이 랩에 싸여 있었습니다.
"OK!"

저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솜씨로 자장 소스를 전자랜지에 집어 넣고 30초간 데웠습니다. 그런데, 그릇을 만져보니까 덜 따뜻합니다. 그래서, 다시 30초 더 데웠죠. 밥 역시 처음에 30초 데웠는데 덜 따뜻해서 또 30초 더 데웠습니다. 승호엄마 같으면 한 번에 할 일을 전 두 번씩 한 셈이죠. 그리고는, 밥을 자장 소스에 비벼서 승호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상 위에는 달랑 자장밥과 물 한컵, 그리고 승호의 숟가락 하나 뿐(젓가락도 없습니다. 반찬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배도 고팠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장을 좋아하는 승호는 단숨에 밥을 다 먹더군요. 밥을 다 먹은 승호 입 주위에 묻은 자장을 가지고 승호를 한 번 놀려주고 나서 저는 제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냉동실에서 식빵을 꺼내 토스터에 굽고 얼마전 집들이 때 제 친구가 사온 코코아 가루를 뜨거운 물에 타고 우유를 섞었죠, 그런데, 식빵이 오래 되어 그런지 영 맛이 없어 냉장고를 열어보니 케익에 뿌리는 시럽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거 뿌려먹었더니 좀 낫더군요.

승호엄마에게도 뭐 좀 먹겠느냐고 물었더니 도저히 여유가 없다고 일축을 하더이다. 하기사, 코코아는 타 줄 수 있었지만 빵은 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조각 남아있던 식빵을 제가 다 먹었거든요. 승호엄마가 빵 달라고 그랬으면 올 들어 가장 추웠던 겨울 날씨에 아침부터 빵 사러 가야할 뻔 했습니다. 휴우...

자, 이제 영화 관련 프로그램도 끝이 나서 시간은 오후 1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몸을 비비꼬는 승호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레슬링을 한 판 했습니다. 이제는 제법 팔과 다리에 힘이 생겨 승호에게 잘 못 맞으면 꽤 아픕니다. 그래서, 안 맞으려고 애를 쓰며 승호를 붙잡아 들어메치기, 업어치기, 밧다리 걸기 등의 화려한 기술로 제압을 했죠. 아마 아래층에 사시는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덩치 큰 학생이 쿵쾅거리는 소리 때문에 굉장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한 번만 더 하자고 애원하는 승호의 간청을 무시하고는 다시 소파에 들어누웠습니다. 힘을 과도하게 써서 그런지 배가 무지 고파지더군요.

그 때, 방에서 들려오는 승호엄마의 다급한 소리...
"지금 몇 시야? 안 되겠어. 뭐 시켜먹어야겠어."
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뭘 시켜 먹지? 자장면? 승호는 아침에 자장밥 먹었는데.. 피자? 아침에 밥도 안 먹었는데..' 이리 저리 생각해봤지만 뚜렷하게 떠오르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대신, 냉장고에 있던 밥과 김치, 그리고 오전에 방영된 '맛대맛' 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했었던 볶음밥 생각이 떠올랐죠.
'그래, 오랜만에 내가 한번 해보자.'

"승호야. 오늘 아빠가 특별히 음식을 만들어볼까 하는데 어때?"
"좋아요!" 승호는 아빠가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한다니까 무조건 찬성합니다.
"그런데, 아빠가 할 수 있어? 아빠는 계란 후라이밖에 못 하잖아."
하고 고춧가루를 확 뿌립니다.
"아니야.. 아빠 할 수 있어."

저는 냉장고를 열고는 김치가 있는지 먼저 확인했습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썰려있는 김치가 있더군요. 안 썰려 있는 김치를 꺼내서 써는 것은 자신 없었거든요. 후라이 판을 꺼내서 기름을 두르고는 김치를 투입했습니다. 그러자, 불의 세기를 잘 못 조절했는지 지글지글 기름이 사방으로 튑니다. 처음부터 당황스러웠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승호의 눈도 있는지라 아무 일도 없는 척 열심히 김치를 볶았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승호와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먹을 음식은 스스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고 설교를 했습니다(저 자신 그러지 못 하면서 말이지요). 그랬더니 승호는 다섯 가지 정도만 할 줄 알면 되냐고 묻더군요(승호는 뭐든지 정확하게 정량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뭐 하라 그러면 몇 시 몇 분까지 하면 되냐고 묻고, 대충 개수가 몇 개다 그러면 정확히 몇 개냐고 캐묻습니다. 한마디로 빡빡한 소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승호는 스무 가지 정도면 되냐고 다시 묻더이다. 저는 그 정도면 되었다고 이야기해주었죠.

저의 전략은 매운 것을 어른만큼 잘 먹지 못 하는 승호용 김치볶음밥을 먼저 만든 후에 저와 승호엄마가 먹을 김치 볶음밥을 이어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승호용 볶음밥에는 김치를 그렇게 많이 넣지 않았습니다. 김치가 익는 동안 저는 TV에서 본 대로 볶음밥에 라면을 넣기로 전격 결정하고 라면을 찾았으나 정통 라면은 없고 쫄면 라면이 있더이다. 그래서, 그것을 물에 넣고 삶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재료가 필요할 때는 "세팅!"을 외치면서 말입니다.

요즘은 끝이 났지만 개그 콘서트의 여러 꼭지 중에서 승호가 제일 좋아했던 꼭지가 바로 '식신 김도마'였습니다. 그러하니 제가 가끔씩 "세팅!"을 외치며 요리를 하는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었겠습니까. 아주 신이 나서는 자기도 식탁에 자기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합니다.

자, 요리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잘 진행되어 불그스레한 색깔의 먹음직한 볶음밥이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익은 쫄면을 집어 넣고 비비고 마지막으로 계란을 준비해서 밥 위에다가 얹어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승호에게 줄 '쫄면과 계란이 가미된 김치 볶음밥' 완성!

아빠와 엄마가 먹을 볶음밥을 완성하는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승호 먼저 먹으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사양하던 승호가 맛있게 먹기 시작합니다. 저는 연이어 김치가 더 들어간 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죠. 밥이 거의 다 볶아졌을 무렵 일을 마무리한 승호엄마가 방에서 나옵니다.
"야, 그냥 중국집에 시켜 먹을 줄 알았더니 대단한데, 괜히 아빠가 엄마 때문에 고생했다."
그러면서, 승호에게 시원한 국물과 먹으라고 냉장고에서 콩나물국을 꺼내 줍니다. 승호는 고맙게도 아주 맛있다면서 밥을 잘 먹고 있었구요.

그런데, 김치 볶음밥의 맛이 과연 어떨지 몹시 궁금하더군요. 저는 밥을 따로 그릇에 담지 않고 후라이 판 그대로 식탁 위에 올려놓고(어렸을 적 우리 형제들끼리 볶음밥 먹던 모습 그대로 말이죠) 조심스레 한 숟갈 떠 먹어 보았습니다. 글쎄요.. 전체적으로 맛은 괜찮았는데 조금 싱거웠습니다. 연이어 승호엄마가 떠 먹더군요. 과연 승호엄마가 뭐라고 말할까 약간 긴장되더군요.

"싱겁지? 김치국물을 더 넣었어야 했나?" 저는 자격지심에 먼저 물었습니다.
"아니, 맛있어.. 아마 쫄면 넣은 것 때문에 약간 싱거워진 걸거야. 훌륭한데 뭐."
하고 격려를 해줍니다.

저는 이 때 몸서리쳐지게 깨달았습니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에게 그 음식을 받아 먹는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입니다. 그 한 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 동안 나는 승호엄마가 만든 음식을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비수같은 언어들을 내뱉었었던가?
'다음부터는 해주는 음식 맛있게 잘 먹어야지..'
정말 어린아이 같이 마음속으로 유치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역시 남의 입장이 되어봐야 그 심정을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나서 제가 음식을 만든 경우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되더군요. 간단한 라면 같은 것 끓이는 것 말구요. 신혼 때, 감동을 준답시고 승호엄마 생일 때 밥이랑 국이랑 간단한 반찬을 요리책 보고 만든 적 있는데 그것도 그 때 한 번으로 끝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승호에게 계란 후라이를 부쳐준 적이 있었는데 승호가 그것을 기억하고 아빠는 계란 후라이만 만들 줄 알잖아 했던 것이지요.

밥을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승호엄마가 그럽니다.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네... 맛있었어."
승호가 거듭니다.
"아빠.. 맛 있었어."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승호가 또 말을 덧붙입니다.
"일요일마다 아빠가 음식 해 주세요."
저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일요일마다 음식을 해야 한다고? Oh, No!'
그 때 승호 엄마가 구세주로 등장합니다.
"아니야.. 아빠 힘 들어서 안 돼."
저는 이 때다 싶어 국면전환을 시도합니다.
"그나저나, 승호야.. 너는 언제 음식 만들어줄거니?"
"아이.. 난 못 해."
"그럼, 설거지라도 해야지."
"키가 안 되는데.."
"그럼, 너 키 조금만 크면 설거지 하는거다."
"예."

요즘 TV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아내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 두 개가 인기잖아요. 그거 가끔 보면 두 드라마 모두 남편들을 어린애 취급을 하더군요(드라마라 그런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봤습니다). 실제로 많은 아내들이 남편을 큰 아들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승호엄마 역시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테죠. 남편들이 그렇게 어린애 취급을 당해야 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아마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지 못하거나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차려 놓은 음식 보고 툭하면 어린애처럼 음식 투정을 하구 말이지요.

어쨌든 요즘같이 음식에 관심이 많은 승호에게 엄마가 아닌 아빠가 음식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 그런 기회가 언제 올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_^)

(승호는 1997년 3월생 남자아이로 2001년 9월초부터 집에서 영어를 접하게 되었으나, 2002년부터 지금까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배우는 것 외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덧붙임) 음, 방금 집에 전화했더니 저녁에 고기 구울거라면서 얼른 오랍니다. 흐흐... 한 번 서비스했더니 큰게 되돌아오는군요. 빨리 퇴근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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