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블럭에 열광하는 이유 2003-06-2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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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었습니다. 지금은 돈 주고 가라 해도 싫지만, 그 땐 의대가 너무

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2학년 1학기를 보내고 나니 도저히 이과에서 버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학을 너무 못해서요. 75점 만점에 40점도 못받았으니 얘기 다된 거지요.



그 중에서도 특히 공간도형, 벡터 이런 부분은 아주 쥐약이었습니다. 그 분야 문제가 나오면

무조건 찍었구요, 관련 수업 시간은 마치 독일어 시간인 양 느껴졌답니다.(제가 제2외국어를

불어를 했으므로 물론 독일어는 한문장도 모릅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전과를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고민 끝에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당시

담임 선생님은 "넌 꼭 할 수 있다"라며 오히려 얼토당토않은 용기를 불어넣어주셨고 그래서

그 엄청난 수학 실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과에서 버텨내게 됐답니다.



대학 시험 보기 전에 혼자서 이런 결심을 했더랬습니다. "이번에 대학 떨어지면 더 이상

미련두지 말고 문과로 옮기자, 그건 내길이 아니라는 증거일테니..." 물론 보기좋게 불합격됐고

재수 생활에 들어갔지요. 당근 문과로 옮겨서요.



아, 학원 다닐 때 수학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공간도형과 벡터가 빠지니

정말 살것 같더라구요. 그렇다고 그 두가지를 뺀 나머지 부분은 다 잘했냐, 당연히 그렇진

않지만 어쨋든 제겐 공간도형과 벡터 없는 세상은 천국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고 수학책과 담을 쌓고 지낸지 벌써 12년째. 가끔 신문에 나오는

수능문제 중 수학 부분을 풀어보려면 이제는 방정식도 못 푸는 정도가 되버렸답니다.



그런 제게 블럭은 정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린 시절 수많은 종이인형과

마론인형을 가지고 논게 고작이던 제가 어릴 때 이런 놀이를 해봤더라면, 그러면 어쩌면

공간도형과 벡터를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수학 점수도 조금 좋아졌을거구,

그래서 그렇게도 가고 싶어했던 의대에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데 사실은 그렇게 안됐길 천만다행이다 생각하며 산답니다.)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규림이에게는 아주 다양하고 충분한 블럭놀이 환경을 만들어주자.

규림이가 3개월 쯤 되면서부터 블럭을 던져줬으니 벌써 만 3년이 다돼오네요. 그리고 지금은

블럭놀이 예찬주의자가 되었답니다. 시작은 공간지각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지만 블럭놀이를 계속하면서 블럭놀이가 줄 수 있는 여러가지 효과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거든요.



블럭놀이의 가장 좋은 점은 수학, 그 중에서도 도형, 공간 관련 부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일텐데요, 이건 사물의 구성 원리와 형태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와도 일맥상통할

겁니다. 프뢰벨이 은물을 고안해낸 기저에는 "어린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어떤

장난감이라도 가장 초기단계 장난감 형태를 잘 알아야 비로소 다른 장난감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며, 더 나아가 새로운 조작법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답니다. 은물 기본원리가 바로 이거지요. 블럭의 기본원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두번째는 바로 요즘 그렇게도 떠들어대는 창의력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의력이라는게 뭐 듣도보도 못한 신제품을 만들어내는 식의 발명은 아닐 터이고, 분명 한가지

재료로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일터인데, 그렇다면 몇가지 기본

조각으로 다양한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블럭이야말로 창의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겠지요.



또 굳이 이런 교육적 효과들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블럭놀이는 맛만 들이면 그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기쁨을 얻고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는 측면에서 좋은 놀이감 중 하나인 블럭의 가치가 다시 한번 확인되는 거지요.



이런 이유로 블럭은 아이의 가장 기본적인 놀잇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블럭부터 접한 아이들이 블럭의 묘미를 느끼고 맛을 들인 후에는, 완성품 장난감을 주더라도

블럭과 완성품 장난감을 다함께 즐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성품 장난감부터 접한 아이들은

블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게 일반적인 전문가들 얘기입니다. 구성물로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재미를 알기 전에 다 만들어진 완성품을 접하게 되면 완성품만 고집하게 된다는

거지요. 제가 직접 실험을 통한 입증을 해본 게 아니라(물론 실험을 하지도 못하겠지만) 장담은

못하겠지만 일리가 있는 말로 여겨집니다.



규림이가 처음 가지고 놀았던 블럭들은 로렌쯔사의 집쌓기와 도미노, 기차블럭

등이었습니다. 특히 도미노가 가장 좋은 놀이감이었지요. 200여개도 더 될 것 같은 도미노를 온

방안을 둘러가며 늘어놓은 후 쓰러뜨렸을 때의 쾌감. 엄마가 도미노를 늘어놓는 것을 멀뚱멀뚱

지켜만보다 어느 순간 그냥 툭 쳐서 무너뜨리고 하던 규림이가 어느날인가, 도미노를 직접 쌓기

시작하고, 자기가 쌓던 도미노가 실수로 무너진 후 "무너졌다"며 통곡을 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합니다.



이 블럭들을 정말 질리게 가지고 논 후 추가해준 것들이 앵커블럭, 가베, 슈필디자인, 레고,

바로크블럭, 패턴블럭, 롬블럭 등등입니다. 이 때는 이미 블럭 맛을 알게된 때라 블럭 종류에

상관없이 뭘 던져주건 다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모양들도 이리저리 쌓는 방법에

따라 아주 재밌는 모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챈 거지요.



이 중에서도 저와 규림이가 가장 좋아하는 블럭이 바로 앵커블럭입니다. 앵커블럭 재질은

간단하게 말하면 합성된 돌입니다. 자연석은 아니니, 이런 표현이 맞겠지요. 돌인만큼 아주

묵직합니다. 무게감이 있는만큼 쌓았을 때 안정감이 있습니다. 막 쌓기에 재미를 들인

아이들에게 더 많은 성취감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되겠지요.



저는 본격적인 가베 입문에 앞서 앵커블럭을 먼저 접해보는게 여러모로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앵커블럭은 가베의 확장블럭이라 얘기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베의 뼈대가

되는 3-6블럭의 확장블럭이라는 거지요. 가베 3-6블럭이 너무 기본형태만 있어 다양한 모양

만들기가 용이하지 않을 뿐더러 개수가 너무 적은 단점이 있는데 이를 타파해보기 위한 시도로

나온게 앵커블럭이라는 게 기본 설명입니다. 이를 보면 앵커블럭은 가베를 충분히 접한 후

심화놀이로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선 가베는 처음 보는 아이들이 머리를 굴려 혼자 이것저것 만들어보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어렵습니다. 가베가 학습블럭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을

겁니다. 선생님이건, 엄마건, 누군가의 체계적인 지도가 뒷받침될 때 가베가 가지고 있는

효과를 충분히 볼 수 있을 거라는 얘기지요. 학습적인 접근이 가능한 만3세 이후가 본격적으로

가베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나이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일각에서 더 늦게, 만 4-5세 이후에

시작하는게 좋다고 얘기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겠지요.



그러나 앵커블럭은 집 만들기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기에 훨씬 가지고 놀기가 수월합니다.

정육면체, 직육면체, 삼각기둥 등 단순한 모양 뿐 아니라 척 봐도 지붕임을 알 수 있는 조각,

아치 등등 다양한 내용물이 포함돼있어 구성물 만들기가 훨씬 손쉬운 거지요. 때문에

앵커블럭은 아이가 물건을 입에 가져가지 않게 된 이후면 언제든 시작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재질이 무해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입에 가져가는 게 안전해보이지는 않네요)



물론 처음엔 쭉 위로 쌓기부터 시작할겁니다. 익숙해지면 쭉 쌓은 후에 지붕 모양 하나 덜렁

올려놓겠지요. 다음엔 옆으로 널찍하게도 쌓아볼겁니다. 이런 연습 과정을 거친 후 아마

구체적인 집 모양을 만들어내겠지요. 규림이가 그런대로 집같은 집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은

앵커블럭을 가지고 논지 6개월이 훨씬 지나서였습니다. 물론 그동안 엄마, 아빠는 옆에서

꾸준히 앵커블럭으로 다양한 집 모양을 만들어줬고, 규림이는 혼자서 추상형태의 자기만의

집을 만들어왔지요.



사실 앵커블럭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다양한 집만들기 블럭으로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앵커블럭이 현재 10가지 종류(4, 4a, 6, 6a....18a)로 다양하게 나와있는데다

한가지에만도 많은 개수의 조각이 들어있어 다른 집쌓기 블럭에 비하면 훨씬 내용물이 좋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한달 전 쯤, 규림이가 드디어 6조각 퍼즐을 해냈습니다. 그동안 블럭은 잘하면서도 퍼즐은

거들떠도 안봐 내심 조급해했었는데, 퍼즐 몇개 사서 머리맡에 두고 엄마가 가끔 해보였더니,

드디어 퍼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퍼즐 재미있어' 이 말이 나오기까지 한

석달 걸린 것 같습니다. 규림이 또래 다른 아이들은 20-30조각 퍼즐도 척척 해낸다는데, 전

6조각만 해도 아주 대견해 보입니다.)



규림이가 퍼즐을 하는 걸 보면서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아이마다 분명

취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취향의 상당 부분은 환경이 만들어준다"는 것. 가끔 "우리

아이는 블럭을 안 좋아해서 블럭을 사줄 마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얘기를 들어보면 그동안 블럭에 별로 노출된 적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집에 블럭이

전혀 없거나, 한두가지 정도 있거나. 있는 경우에도 엄마, 아빠와 블럭놀이를 많이 해보지

못하고 그냥 집안 어딘가에서 굴러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 큰 어른들도 접해보지 않은 것은 잘 못하는데(심지어 먹어보지 못한 것은 잘 먹지도

못하는데) 어린 아이들이 무슨 재주로 경험해보지 않은 블럭을 좋아하고, 처음 보자마자

환호하며 달려들어 블럭놀이에 몰두하겠습니까. 우선 블럭을 아이 앞에 던져주고 아이가

흥미를 보일 때까지 엄마, 아빠가 블럭놀이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이가 자연스레 블럭놀이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작업과정이 필요하겠지요.



여기서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금물이겠지요. 특히 가격이 비싼 제품은 "저게

얼마짜린데 거들떠도 안봐. 에구, 아까워라"하시며 아이를 막 몰아댈 수도 있을 겁니다

(큭큭, 저도 그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지 노력하며 산답니다)

물론 이는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입니다. "한달이고, 두달이고, 일년이고라도

기다려서 네가 블럭을 좋아하게 만들겠다" 뭐 이런 정도 각오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도

드네요.



다음은 37개월 규림이가 혼자서 앵커블럭을 가지고 쌓은 모양들입니다.







늘 집만 쌓았고, 다른 모양 만드는 것 딱히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몇달 전인가는 이걸 만들고 '기차'라고 해 신기한 마음에 찍어놓았던 사집입니다.












이건 위와 같은 걸 방향만 달리해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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