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만으로도 프리미엄 2010-03-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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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중순께 응급실 구경을 할 일이 있었어요. 베드에 누워서 IV 꽂고, EKG 모니터링하매...

평생 건강 자신하던 제겐, 기념비적인 일이어서 사진 좀 찍어달라 했는데,

남편이 콧방귀도 안뀌어 인증샷이 아쉽네요.

 

자정을 넘긴 시간, 얼굴을 보아하니 나보다 상태가 안좋을 거 같은 레지던트 아가씨, 피로라도 풀어줄라꼬 힘겹게 싱거븐 소릴 늘어놓고 있는데, 커튼 쳐진 옆 베드 분위기가 심상찮더군요.

경찰이 왔다갔다 하는 것도 보이고 응급실 스텝들 발소리도 급하더니...

급기야 가슴을 후벼파는 10살쯤 된 여자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내 아이가 우는 것 같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더군요. 자기 직전까지 멀쩡하게 활동하던 아이엄마가 손목을 칼로 그었답니다... 몇시간 후 제가 응급실에서 풀려(!)나올 때까지 그 쪽의 생사가 아직 분명치 않은 상태여서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나왔습니다만, 정신이 반쯤 나가 서지도 앉지도 걷지도 뛰지도 못하던 남편, 두 세시간을 지칠 만큼 울어도 또 가슴 찢어지게 울어대던 아이가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인생가도를 마구 달리다 보면 잊고 살던 것들이 이런 상황들에선 조금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우울증때문이라고 쉽게 병리화되는 많은 사람들의 좌절이 많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촉망되는 학자, 대기업 부사장의 자살, 천재소리 듣던 아이들이 내신관리 못해서 혹은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상처받아 병원신세를 지는 것이 부지기수라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그런데, 아파보면, 수많은 골치아픈 문제를 다 떠나서, 정상적으로 숨쉬고, 사회인으로 얼굴 내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싱거운 능력조차 참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몇 년을 엄마표 영어로 공들였는데, 왜 책도 스스로 못읽고 답보상태일까, 어떤 애들은 책읽기가 오락이라는데, 우리 똥강아지는 30분 그 넘의 집중듣기하는데도 저렇게 힘겨운 걸까, 직장도 다니며 애들 가르치는 엄마들도 있다는데, 게시판에서 하는 소릴 좇아가기도 정신없는 나는 뭘까,.. ...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백만불을 준다 해도 선뜻 바꿀 수 없는, 숫자로 가치매길 수 없는 프리미엄이 붙은 분이십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우리의 아이들이나. ^^

 

우리를 달리게도 하고, 멈추게도 하는 크고 작은 욕심과, 목표와. 주위의 시선과, 이정표들,

늘 말랑말랑하게 다듬으며 달래가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튼튼해서 아파도 표도 안나는 게 억울한 분들, 감사한 줄 알고 사셔요~~~^^

가을에 온다 하곤, 숨이 짧아, 3월 눈에 홀려, 잠시 수면에 뜬 쪽팔리는 anthropo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거든요.

 

 

사족:

- 초4는 기자활동이니 뭐니 여러모로 활동이 많아져서 영어라고는 더더욱 규칙도 없이 합니다. 39 clues 8권이 출간되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선물받은 Grammar Cue라는 문법책을 조금씩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쉽고 만만하다고 낄낄거리며 하지만, 자기가 드문드문 알고 있던 것을 꼼꼼히 정리해주니(예를 들어 wolf->wolves) 도움된다는 광고성 멘트도 잊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만만할 때 이런 걸 주니, 물어보지 않아도 비슷한 사례를 읊어대며 정리가 되는 듯합니다. 문법적인 것, 늦게 하는 것의 재미를 톡톡히 봅니다.

또 최근 둘째를 위해 빌린 리더스 Amelia Bedelia 시리즈를 미친 사람처럼 웃어제끼며 봤습니다. 중의어가 많은데,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표현도 많아, 꼬마는 오히려 언니따라 웃는 척 하다가 부연설명을 해주니 환하게 웃습니다. 대부분 언아이캔 레벨 2던데, 외국인에게는 좀 달리 레벨화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동음이의어 등을 익히고자 한다면 추천합니다 ^^

 

-올해 초등에 입학한 둘째, 이뻐 죽겠습니다. 학교 들어가는데 엄마가 아프니 나름 군기가 바짝 들어 밥도 부지런히 먹고, 매일 전화로 준비물 뭐뭐 있다 알려주고. 엄마 아픈 새 자기는 바보될까봐, 집에 있던 책들 뒤져서 혼자 영어공부한다고 난리법석이었네요. 얼마나 갈진 모르지만, 그저 고맙습니다.

 

의사가 다 나았다고 해야 다 나은 거겠지만, 최소한 외양으로는 멀쩡하게 제 몫을 하고 살고 있어서 그것도 고맙습니다. 2월엔 아이에게 10페이지 책 한 권 읽어주기도 숨차더니만, 지금은 3시간짜리 강의들 속사포처럼 떠들고 있고, 아이들에게 고함도 씩씩하게 질러댑니다.

해야 할 일들의 데드라인을 생각하면, 아이들 교육과 관련된 숨막히는 이야기들이 들릴 때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치만, 내 프리미엄 생각해가며 토닥토닥해가며 갑니다.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그 프리미엄이 느껴지시길 바라며... 꼬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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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2010-03-26 09:48 

이런 글을 읽을때마다 맘약하게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더한 아이들도 키우며 사는 엄마들이 한둘이 아닌데..하면서도

가끔씩 감정누르기가 힘들어지는게 자식이라서 그런가봅니다.

병원갈때마다 정말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마음도 엄마라서 그러겠지요~

사람이란것이 참으로 간사하게도 그런마음을 잊고 산다는거죠..

하긴 ..잊을수 있다는것도 큰힘이네요~^^*

다시한번  프리미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셔요~!

의사샘이 다 나았다고 하실때까지는 무엇보다도 건강에 1순위로 두셔요~^^*

꼭이요~!!!!!!

 

anthropo 2010-03-28 10:39:20
맘고운 벨벳님,
아이들에게 늘 좋은 말, 좋은 얼굴,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산다면 그게 어디 살아있는 엄마랍니까.
(에구, 물론 그러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울 애들은 엄마 목소리가 작아져서 우아한 건 어울리지 않으니, 빨리 나으라고, 클레어는 자기가슴이 까맣게 탄다고 하더라구요. 둘째는 그것도 쪼금 괜찮다고 속삭이다가 언니한테 꿀밤맞고.ㅎㅎ)
제 집안 어른의 속상한 모습, 약한 모습, 잘못하는 모습도 겪어가며 아이들도 크는 거 아닌가 싶어요.

은아가 어디 많이 약한 건 아니죠. 누구나 약한 구석이 있지만, 사람은 다 제 감당할 몫을 단단히 헤치며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수업엔 간이 약해서 10년째 병원 다녀가며 수업듣는 늙은 학생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3시간씩 꿋꿋이 잘 버티며 즐겁게 하는 그 친구가 참 크게보여요. 그 끈을 놓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가족의 몫이겠지요.

저한테는 위기라면 위기였는데, 내 옆에서 남들이 바둥거리는 그 끈을 스스로 놓아버린
그 분의 자존감은 왜 그 지경이 되었을까. 슬프고 미안하고 알게해주어 고맙고 그런 맘으로
기도하며 나왔어요.
네. 전 정신 바짝 차렸습니다. ^^
벨벳님도 건강하셔요 (그 맘때는 이틀밤 꼬박새도 괜찮긴 하더이다만... 궁시렁.)
홍박샘 2010-03-22 21:45 

쑥쑥에 당신만큼 먹물이 짙게 든 사람이 없을텐데 시답잖은(?) 글 참 잘 쓰시네 그려.

많이 배웠다고 문장마다 전문용어 도배질해 거드름 무진장 느끼게 하는 당신 동네 사람들 하고 참 다르요.

 

어찌 그리 아팠을꼬? 걱정스럽구먼요.

완곡하고 유머있게 썼지만 상당히 심각한듯 해 안쓰러워요.

 

지난 학기 좀 쉬는 사치를 부렸다가 도태될까 두려워 나두 원어민들 앉혀놓고 대학원 강의하고 있어요.

아따, 신경질 나게, 준비할 게 드X게 많아.

내가 이 짓을 왜 할까 후회하다가 원래 이리 살아 버릇했는데 누구 탓을 하나 싶네요.

그런데 너무 피로하고 육신이 쑤셔서 쉬고 싶어요.

 

몸 조심하세요. 나의 쑥 친구여~

참, 애들 얘기 잘 들었어요. 이쁜 것들....

anthropo 2010-03-23 14:26:04
홍박샘님, 왠지 예가 비밀 아지트 같어요, 늘 여기에 글 남겨주시니...*^^*
맨날 근거대고 일정정도 객관성 신경써야 하는 글쓰다가 이런 글 쓰는 거 살갑고 재밌지 않으셔요? 저도 그런가 봅니다.

이렇게 보험료 써가며 폼나게(? 세상에 이런 건 정말 없지요...) 아픈 게 첨이라...
너무너무 열심히 사시는 분들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나봐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 가치가 온전히 느껴지지 않는데,
어찌 가장 비실거릴 때 그토록 절실히 와닿았던지...꼭 아끼며 사시라구요.

종래 하시던 대중강연과 출장, 쑥연구소 일 등등만으로도 super duper
그래도 분명 짜증나게 신경쓰이던 그 원어민 대학원생들 상대하는게 나중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ㅎㅎ 아시죠, 의외로 영어강의 거지같이라도 할 수 있는 자격있는 인력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거.
존재만의 프리미엄이 아니라, 엑스트라 프리미엄이 될 것 같다는 감이 팍팍 옵니다. ^^

그래도 몸은 돌보십시요. 시간나면 검진도 해보시고,
멈추기 힘든 때라면 홍삼차라도 꾸준히 ! ㅎㅎ 할매같다는 생각 들지만 제가 요즘 애용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구요, 저도 맘으로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