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삭둑이 2015-01-2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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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햇볕이 따뜻한 날이면 어릴 적 외활머니댁에서 지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햇볕이 드는 대청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하늘도 올려다보고 마루에 누워 천장의 서까래를 바라보며 개수를 세어보기도 했지요. 분합문의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과 마루 가운데 자리잡고 있던 커다란 난로의 온기가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대청마루 복판에 놓여있던 난로 위에는 커다랗고 노란 물주전자가 뿜어내는 스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뚫어져라 바라보다 병아리마냥 졸기도 했습니다. 난로 주변엔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특별히 울타리가 쳐있던 걸 보면 어린손녀딸을 무척이나 아끼셨던 어른들의 자상함이 느껴집니다.

 

햇살 좋은 겨울날, 할머니께서는 대청마루에 앉아 북어를 방망이로 두드려 껍질을 벗기고 살을 쪽쪽 찢어 발라내셨습니다. 마른 반찬으로 준비하시는 거였죠. 남은 대가리와 껍질은 난로 위 들통 속으로 들어가고 푹~ 끓여 국물을 우려냅니다. 북어 국물의 구수한 냄새가 집안으로 퍼질 즈음이면 커다란 도마와 밀대가 준비되고 메밀가루를 반죽해서 국수를 만듭니다. 도마 위에서 퍼져가는 메밀가루 반죽은 마치 커다란 쟁반이 된 듯, 할머니가 미는 밀대를 따라 사방으로 둥글게 커져갔고 그 모습이 신기해 넋을 놓고 바라보았지요. 어린 나이이지만 할머니의 수석 보조 역할을 자처하며 찰싹 붙어 앉아 봉죽을 들었습니다. 간간이 반죽위에 가루도 뿌리고 반죽을 척척 접어 칼로 썰어낸 국숫발을 커다란 쟁반에 뭉치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털며 술술 풀어 놓았지요.

 

구수하고 진한 북어국물에 잘 익은 김장김치를 썰어 넣고 갓 밀어 만든 굵은 국수발을 풀어 넣고 저으면 뿌옇던 반죽은 맑은 색으로 윤기를 내며 익어갑니다. 드디어 ‘칼삭둑이’가 완성되는 거죠. 할머니께서는 ‘구뚜룸한 칼삭둑이’라며 좋아하셨습니다. 얼큰하고 구수한 국물의 칼삭둑이는 어린나이에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코를 훌쩍거리며 먹기에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할머니의 손맛이 여전히 입안에서 맴돕니다.

어쩌다 그 맛이 그리워 도전해 보지만 구수했던 그 맛은 아니니, 북어의 변심인지 메밀가루의 변심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기대에 가득 차 열심히 메밀가루를 치대고 숙성도 시켜보지만 할머니의 칼삭둑이는 추억 속에 머물 뿐이네요.

 

칼삭둑이는 칼로 삭둑삭둑 잘라 만든다는 말에서 비롯된 순 서울토박이 말입니다. 옛날 궁중에서 썼던 용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요즘엔 김칫국에 메밀국수를 넣은 것으로 설명이 되겠지요? 하여간 여름엔 애호박을 곁들인 칼국수가, 겨울엔 김장김치를 넣어 끓였던 칼삭둑이가, 비오는 여름날이나 오늘처럼 햇볕이 좋은 겨울날이면 할머니의 흐뭇한 미소와 함께 떠오르니 나도 나이가 먹긴 했나 봅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늙었다는데...

그래도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할머니 하면 떼어 놓을 수 없는 음식들이 오늘의 나를 받치고 있으니 나이 듦도 꼭 나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립고 따뜻했던 기억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니까요.

 

할머니의 손맛이 엄마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로 내려옴에 감사합니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베란다에 조르륵 놓인 항아리들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고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잘 삭은 젓갈과 몇 년 째 간수를 빼고 있는 뽀~얀 소금도, 김치 냉장고로 그득한 김장김치도 내게는 행복입니다.

예전에 마당 한구석 광 속을 쌀과 연탄으로 채우고 뿌듯해 하시던 부모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 것 같습니다.

인스턴트가 판을 치고 전화 한 통화면 모든 음식이 코앞에 진상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서성대는 내 모습이 좋습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김치를 담는다는 말은 나는 쓸데없는 중노동을 하고 있다고 과시하는 말이라고요. 누군가에겐 중노동이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이며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 또한 못지않은 중노동이라면 중노동이겠지만 아이를 거부하는 엄마는 없습니다. 최소한 제대로 된 엄마라면요.

겨울 볕이 따뜻할 때, 내 아이가 옆에 있다면 따뜻함이 배가 되고, 아이와 함께 맛난 것을 먹노라면 아이가 먹는 모습만 봐도 엄마의 얼굴엔 미소가 묻어납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도 되니, 이처럼 소중한 중노동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아이와 반죽도 같이하고 과자도 함께 구우며 할머니에서 엄마, 그리고 나에게로 전수된 손맛이 내 아이에게도 전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나보다는 더 바쁜 세상을 살아갈 아이겠지만, 이왕이면 내 아이도 나와 같은 행복을 자신의 아이와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햇볕이 따뜻하고 화창한 겨울 날, 구수한 북어 국물에 김장김치 숭숭 썰어 넣고 끓인 칼삭둑이를 땀을 흘리고 코를 훌쩍이며 맛있게 먹을 내 아이를 상상해 봅니다. 비록 그 맛은 달라도 할머니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내 아이도 행복해 하겠지요.

 

길다고 해도 길지 않은 인생이며 아이와 함께 하는 날들이 많은 듯해도 오롯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직은 아이가 나와 함께 마주하는 시간이 넉넉할 때, 아이와의 추억 쌓기에 시간을 할애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크는 것도 잠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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