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그늘 아래서 2015-04-0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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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첫날입니다. 이젠 완연한 봄으로 들어서겠지요?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으니, 봄이 오기까지는 인내심이 필요한 듯합니다.

아파트 마당의 온갖 꽃나무들이 물기를 머금고 제각각 꽃망울을 터뜨리려 부지런히 준비합니다. 개나리, 벚꽃 그리고 목련까지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예전엔 이른 봄을 알리는 매화로부터 시작해서 꽃들이 순서지어 피었던 것 같은데 요즘엔 동시다발 한꺼번에 만개하니 꽃들의 봄은 몹시 바빠졌습니다. 잠깐 사이 스쳐가는 봄이,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이 짧음이 아쉽기도 하니 한껏 즐길까 합니다.

 

목련꽃이 봉오리를 머금을 때면 친정할아버지의 생신이 떠오릅니다. 4월 중순이면 목련꽃과 함께 할아버지의 생신준비로 바빴던 어머니들과 마당에 핀 목련나무 아래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미있게 놀았던 사촌들도 생각납니다. 할아버지의 생신은 봄을 알리는 집안의 첫 행사였고 어찌 보면 연중 제일 큰 집안의 잔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할머니의 지휘 하에 며느리들의 손과 몸은 쉴 새 없이 바빴지만 나를 비롯한 사촌들에겐 손꼽아 기다리는 신나는 날이었지요.

 

교육계의 원로이셨던 할아버지께서는 한마디로 근엄한 분이셨습니다. 평생 큰소리로 화를 내시는 것 한 번 본 적이 없고 항상 온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100세를 넘게 사셨습니다. 100세 이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고 집필활동도 하셨으니 체력이나 정신력 또한 대단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의식의 흐트러짐 없이 담소를 하셨고 잔잔하게 천수를 마감하셨습니다. 당신의 수명이 마감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시며 눈을 감으셨다고나 할까요. 자손들에겐 천수를 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본보기를 보이셨다고 할 수 있으니 정말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안의 어른으로서 할아버지의 자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근면과 검소’를 강조하시며 가족들에게 항상 당부하셨고 가족 간의 화목에 힘쓰셨습니다.

집안의 모든 행사에 식사는 온가족이 한자리에서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셨습니다. 커다란 방에 교자상을 두 줄로 길게 붙여 놓고 숟가락을 들고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아이까지 모두 자리를 잡으면 간단한 훈화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으니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 또한 가족에 대한 진정한 배려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방학을 하게 되면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와 상장까지 한 학기동안의 결과물을 들고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습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한 보고회와 같은 작은 행사입니다. 잘 했던 못 했던, 무조건 들고 가서 보고를 드렸지요. 아이들을 할아버지 방으로 들여보낸 엄마들의 심정은 헤아려보지 못했지만...

성적표와 상장 등을 보여드리면 한 학기 동안 공부하느라 애썼다고 일단 치하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하나씩 들여다보시면서 칭찬도 해 주시고, 부족한 과목은 무엇이 어려웠었는지 다음엔 잘 할 수 있을 거라 격려를 잊지 않으셨지요. 체육 점수가 낮으면 몸이 약해서 안 되니 많이 뛰어 놀아라, 점수가 높으면 훌륭한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 추겨 세우기도 하셨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영어 성적이 좋으니 이다음에 외무부장관이 되면 좋겠구나 등등... 아이들마다 내용도 새록새록 다양합니다^^

 

보고회가 화기애애하게 끝나면 우리 모두는 자신감과 다음엔 더 잘하겠다는 각오로 무장이 되곤 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는 항상 할아버지께서 문갑을 여시는 순간입니다. 문갑 안에는 전병과 초콜릿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주전부리들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기대감에 들뜨기에 충분했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주시려나. 넉넉하진 않았지만 할아버지께서 하사하시는 주전부리는 주전부리 이상의 강력한 파워를 가진 특별상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아마도 손주들을 위해 깜짝 상으로 매번 고민하며 준비하셨겠지요.

 

해마다 가을이면 도시락을 준비해서 떠났던 가족소풍과 노래자랑, 숨은 보물찾기, 잔디에서 구르기.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의 상품을 받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들. 그 추억이 여전하고 눈앞에 선하니 할아버지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강한 듯, 강하지 않고, 엄격한 듯 온화하셨던 그 분.

자녀 6남매에서 나온 손주들이 세월이 흐른 지금, 반듯하게 제 자리를 잡고 살고 있음은 강인한 정신력과 인자함으로 집안의 어른으로 그 모두를 보듬고 가시려 노력했던 그 분의 덕분이 아닌가 하니 감사함과 존경스러움에 가슴이 뭉클해져 옵니다.

 

물 잔의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채워진 물에 우선 감사하고 만족하며 노력하라는 할아버지의 말씀과 인자하신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부모님들도 할아버지의 훈화를 평생 가슴에 담고 가족과 가정을 건사하셨겠지요. 일종의 사명감이 자리했을 지도 모릅니다.

증조할아버지를 따뜻한 분으로 기억하는 우리 아이들 또한 문갑속의 주전부리를 그리워하니 다행이기도 감사하기도 합니다.

 

목련꽃이 화려한 올 봄에도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짧은 봄날을 아쉬워 할 듯싶네요.

가던 발길을 멈추고 멍~ 하니 목련꽃을 올려다보고 있을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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