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되면 나 어렸을 때 뵀던 어른들이 부쩍 그립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실 것만 같았던 그분들을 떠올리면 아스라한 추억과 함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언니와 연년생이었던 나는 어린 시절을 주로 외가에서 보냈습니다. 첫 손주들이다 보니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요. 추석이나 설밑이 되면 대종갓집의 맏며느리였던 외할머니는 누구보다도 분주하셨습니다. 나박김치, 백김치, 장김치, 백족편과 장족편, 약과와 다식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음식들을 미리 미리 장만하셨습니다. 술도 담그셨는데 내 키보다도 훨씬 큰 독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독 속에 불을 붙였고 훨훨 타오르는 불씨를 보고 싶어 삼촌들에게 안아서 들어 올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할머니의 진두지휘 하에 장정들이 모여 독을 굴리고 독이 충분히 달구어 지면 불씨가 꺼진 독은 안방 옆 찬방으로 옮겨져 술을 담게 되었습니다. 몹시도 신기했던 광경이지요. 지금도 장을 담그거나 젓갈을 담기 전에 항아리를 가스불 위에 엎어 소독을 할 때면 문득 그 때가 떠오르곤 합니다. 커다랗고 무거운 술독을 소독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에 비하면 가스레인지가 얼마나 간편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수십 명의 가족들이 모여 제사를 모시고 차례도 지내고 게다가 잦은 손님치레까지, 외가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음식을 장만하느라 바쁜 할머니의 심부름을 할 때면 너무나도 신이 났지요. 은주전자에 담긴 약주를 사랑채로 나르는 일은 항상 내 몫이었고, 할아버지께서 ‘수야~’하고 부르시면 득달같이 달려 다녔습니다.
이제 내가 종갓집 며느리가 되어 제사와 명절을 치르니 철딱서니 없이 신나기만 했던 그 시절, 할머니께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맏며느리는 하늘이 낸다’는 어른들 말씀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셋째며느리지만 여차저차 하여 15여년을 큰형님대신 대소사를 치렀고 이제는 형님이 해외에서 들어오셨으니 홀가분한 지차의 자리를 회복했습니다. 사실 말이 종갓집이지 외할머니와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간 큰형님대신 맏며느리의 몫을 기꺼이 해 낼 수 있었던 까닭은 어려서 눈에 익었던 외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조상을 섬기고 어른들께 잘하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남보다 아이들이 많으니 항상 조심스럽기도 하고요.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 어느 분도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철이 되면 장도 담그고 장아찌도 담그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벌이는 나 자신을 보면 어린시절 보고 배운 것이 얼마나 속속들이 스며들었는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한 여름엔 마른 굴비와 오이지가 고기반찬보다 더 당기는 걸 보면 어려서 먹었던 입맛과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버릇만 세 살에서 여든까지 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입맛도, 평생을 살아가는 가치관도 세 살에서 여든, 아니 이제는 백세까지 갈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급변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데에는 구태의연한 뒷북일지 모르겠지만 이게 나 자신인 걸 어쩌겠어요. 정월엔 장을 담그고 봄이면 각종 장아찌와 젓갈, 여름이면 오이지 가을이면 버섯과 가지, 호박, 생선을 말리고 초겨울엔 김장 등등... 자동 입력된 숙제입니다. 놓치면 허전하기까지 하니 이대로 살아갈까 합니다.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제는 내 딸아이에게까지 내려가는 대물림인 듯싶습니다. 두고 봐야겠지만 아직은 학생인 딸아이가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있을 때, 스스로 김치를 담가 외국인들까지 먹였다니 피는 못 속이는가 봅니다^^
할아버지께서 기거하시던 사랑채의 화선지와 붓, 벼루, 먹의 향긋하면서도 짙은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생생하고 문갑위에 놓인 연적과 문진의 단아한 모습도 눈앞에 선합니다. ‘잘한다 잘한다’로 어린 손녀의 기를 살리시고 엄지손가락을 버쩍 치켜세우며 ‘최고!’라고 외치시던 분들. 어린 손녀와의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키시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덕담만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그 분들이 추석을 하루 앞 둔 오늘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저도 제 아이들을 당신들께서 제게 하셨듯이 그렇게 키우고 싶습니다. 덕담을 해 주고 온화한 미소와 깊은 정으로 보듬어 안고 싶습니다. 당신들께서 보여주신 어른의 품격도 갖추고 본받고 싶은 어른의 모습으로 남고 싶습니다.
오늘도 외할머니께서 늘 입에 담고 하시던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겨봅니다.
‘사람은 죽어서 두 손을 배위에 올려놓을 때까지 큰소리 칠 게 없느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감사합니다!
(추석 전야 늦은 시각, 명절준비를 마치고...)

쑥쑥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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