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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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아침에 출근하다가 서쪽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달이 너무 크더군요. 원래 지평선에 가까이 갈수록 달이 커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대기에 의한 돋보기 현상입니다), 청명한 초겨울 하늘이라 그런가요? 너무 크고 밝아서 처음에는 달이 아니라 무슨 UFO가 저에게 다가오는 줄 알았습니다. '아.. 이건 빨리 observing the moon 글을 올리라는 계시구나' 하고 멋대로 생각하고는 최종 정리해서 올립니다. 그런데, 이번 글은 좀 깁니다. 전에 글을 짧게 쓰기로 결심했었는데 이번에는 여러 날에 걸쳐 일어난 일을 쓰자니 어쩔 수 없이 길어졌습니다. 다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전 어렸을 때부터 달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주학자 칼 세이건이 진행했던 '코스모스'라는 프로그램이나 책을 보면 달이 여러 개인 행성의 그림들이 나오는데 신비하게 보였었죠. 우리 지구도 달이 여러 개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초승달, 그믐달, 보름달, 반달이 한꺼번에 하늘에 떠 있고 밤하늘에는 늘 최소한 하나의 달이라도 떠 있겠죠? 이렇게 되면 별 관측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싫어하겠네요.. 달 빛 때문에 별이 안 보인다면서..
추석 때를 전후하여 승호의 달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마루에서 놀다가 갑자기 "아빠.. 저기 달 떴다" 하면서 저 보고 달 보라고 다그치는 적이 많아졌습니다. 길거리를 걸으면서 "오늘은 달이 안 따라오네..", "오늘은 달이 커요" 식으로 주절대기도 합니다. 승호는 애기 때부터 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 자개장 농 있죠?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이 하나씩은 안방에 마련해 놓으셨던 농 말입니다. 승호가 애기였을 때 본가에 가면 승호는 할머니 품에 안겨 농에 붙어 있던 달을 만지작거리고 노는 것을 좋아했었습니다. 시커먼 농에 밝고 커다란 달이 붙어 있었으니 다른 것 들 보다 눈에 잘 보였거든요.
한 번은 또 달 이야기를 하길래 "저거 망원경으로 보면 더 잘 보이는데.." 하고 제가 별 생각 없이 이야기했더니 승호가 망원경이 뭐냐고 묻더군요. '벅스 라이프'에서 본 개미가 만든 망원경이 생각나지 않냐고 되물으면서 망원경이란 멀리 있는 것을 잘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었더니 집에도 있냐는 겁니다. 마침 집에 커다란 쌍안경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있다고 했더니 보여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집 밖에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보여주겠다고 하고는 넘어갔었는데 한 참이 지난 10월 중순경이 다 되었을 때 망원경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 이번에 달 프로젝트를 한 번 하자!'
저는 아주 간단한 준비를 했습니다. 소요시간 5분도 안 걸리는 준비요.
'Papa, please get the moon for me'가 수록되어 있는 'The very hungry caterpillar' 비디오 테이프가 잘 있나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께서 방학을 이용해 미국에 다녀오시면서 우주박물관에서 사다주신 'America's explorers of space' 란 책도 꺼내 놓았구요. 무엇보다도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쌍안경을 찾았습니다. 이 쌍안경은 승호 엄마가 직장에 다닐 때 회사에서 나온 선물이라네요. 무슨 패션 회사에서 이런 것을 선물로 주냐 하고 제가 몹시 이상하게 생각했었던 그 망원경입니다.
문득 다른 아이들처럼 달이나 별에 관심이 많았던 저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납니다. 저는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서 어린이날 부모님께서 사주신 천체 망원경으로 별을 보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운 좋게도 월식이 일어나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한 적이 있었는데 육안으로 볼 때는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안 보이는 부분이 망원경으로는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좋아했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그 때 그 망원경은 제 본가 어딘가에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대학교 때 아마추어 천문회 서클 활동을 하면서 아름다운 목성과 토성의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짜릿했던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승호야.. 망원경으로 달 보러 나가자.. These are binoculars."
승호에게 두꺼운 옷을 입히고 망원경으로 달을 보러 나간 첫째 날이 10월 29일 밤이었습니다. 관측 장소는? 아파트 주차장이었습니다. 그 전에 저희 집(12층입니다) 베란다에서 달을 보려고 몇 번 시도했었지만 잘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밖으로 나왔지요.
일단 어려웠던 점은 승호가 망원경을 달에 못 맞춘다는 것이었어요. 천체 망원경 같으면 제가 방향을 잡아놓고 승호에게 보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이건 쌍안경이잖아요. 넓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달을 쌍안경으로 본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가 승호 눈높이에 맞추느라고 쭈그리고 앉아 쌍안경으로 달을 찾아 그대로 쥐고는 승호 보고 어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영어하느라고 힘들었습니다.
"Look at the moon through these binoculars!"
하지만, 계속 시커먼 하늘만 보인다는 거에요. 그래서, 승호에게 "승호야, 아주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봐" 그랬죠. 하지만, 승호는 확확 움직입니다. 하여간 그러기를 몇 차례, 드디어 승호가 "와! 보인다! 아빠 달이 보여요!" 하고 소리칩니다. 저는 "그래? 어떤 모양이니?" 하고 물었죠. "엄청 밝구요. 둥그래요. 추석 날 보았던 달 같아요.." 하고 대답합니다.
그 날이 10월 29일이었는데 음력으로 13일입니다. 따라서 보름달에 거의 다가갔다고 보면 되지요. 승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승호야.. 모양 말고 달 표면은 어때?"
"음..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시커먼 것이 있어요. 엑스자 모양으로 꺼먼 것이 그려져 있어요.."
첫째 날의 달 관측은 그것으로 마쳤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달이 어떻게 변했을까 보자고 약속하고는 들어왔죠. 그런데, 저희가 달을 관측하고 있으니까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가 슬쩍 옆에 와서는 뭐하나 보고 가더라구요. 아마도 남의 집 엿보는 것 아닌가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요즘 세상이 좀 무섭습니까?). 집에 들어와서는 그 날 녹화한 디지몬 만화를 보고 연이어 제가 준비한 'The very hungry caterpillar'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원래는 'Papa, please get the moon for me'만 보려고 했지만 어디 그게 제 마음대로 됩니까? 비디오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 5개를 다 보고 말았죠. 뭐, 다른 것들도 본지 오래되었으니까 같이 본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죠. 하여간 이 작품은 달이 커졌다가 찌그러들고 다시 커지는 것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게다가 아이와 아빠간의 유대감이 잘 나타난 작품이기도 해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America's explorers of space' 라는 제목의 오래된 책은 처음 달을 관측하기 며칠 전에 이미 맛을 보여준 상태였습니다. 그 책에는 달에서 우주 비행사가 걷고 있는 유명한 사진도 있고, 달에서 바라 본 지구 사진도 있구요, 기타 달에 관한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달에서 바라본 지구 사진을 볼 때는 제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승호야.. 지구에서 보면 달이 보이지? 그러니까 달에서 보면 거꾸로 지구가 보이겠지? 이 사진이 달에서 본 지구 사진이다."
아폴로 우주선을 실은 로켓트가 불을 내뿜으며 올라가는 사진을 볼 때는 승호도 어디서 본 적이 있는지 카운트다운을 하던데요.
그 다음 날인 30일은 날씨가 흐려 달을 못 보았구요. Blue moon이 같은 달에 뜨는 두 번째 보름달이라는 정보를 쑥쑥에서 알게 된 것이 10월 31일 이었는데, 승호는 달이 가장 둥그럴때 꼭 봐야 한다고 제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보름달 답게 둥그스레한 것이 참 보기 좋더군요. 그 날도 망원경을 달에 맞추느라 실랑이를 한 끝에 관측을 마칠 수 있었는데 승호는 다 보고 나서 시큰둥합니다. 뭐, 눈으로 보는 것이랑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죠.
그 마음 제가 알지요. 아주 성능 좋은 망원경이면 다를지 모르나 쌍안경으로 달을 볼 때 보름달의 경우는 더 잘 보이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원래 보름달이 밝기 때문에 크레이터(crater)라고 하는 달의 곰보 자국이 잘 안보입니다. 크레이터를 보려면 달이 찌그러들었을 때 봐야 달과 하늘이 만나는 경계면에 울퉁불퉁한 것이 잘 보이거든요. 야구 중계 방송 가끔 보면 카메라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비출 때가 있는데 카메라는 기본적으로 줌 기능이 있어서 달이 잘 보이거든요? 자세히 보신 분들은 크레이터를 보셨을 겁니다.
"승호야, That is a full moon. 이제 달이 어떻게 될까?"
"엉, 점점 작아져.."
"그래, smaller, smaller.. 조금 더 작아져서 반달이 되면 그 때 또 보자. 아마 더 멋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걸?"
하고 저는 며칠 후면 승호가 보게 될 크레이터의 존재를 슬며시 암시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보름달에서 반달(하현)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아야하는데 승호 감기가 심해지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데다가 저랑 승호 엄마랑 둘 다 바쁜 일이 겹치는 바람에 도대체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며칠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출근하는데 글쎄 새벽달이 보이더라구요. 방향을 보니 동쪽입니다. 이제 막 뜬 그믐달이었습니다.
"아뿔싸! 벌써 그믐달이 뜨는구나.."
그믐달은 새벽이나 되어야 동쪽 하늘에 나타나기 때문에 승호랑 관측하기는 쉽지 않지요. 며칠 후면 등장할 초승달부터 다시 관측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초승달, 반달, 보름달, 그리고 그믐달을 영어로는 뭐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차례대로 a new moon, a half moon, a full moon, an old moon입니다. 달의 오른쪽부터 보이기 시작해서 나이가 들어가면 쟁반같이 되었다가 오른쪽이 사라지면서 그믐달로 됩니다. http://i.kebi.lycos.co.kr/~steacher/ff_size.html로 가시면 달의 공전 위치에 따라 우리에게 보이는 달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움직이는 그림을 이용해서 설명한 그림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조하세요.
11월 19일 밤, 마루에 있던 승호가 갑자기 소리칩니다.
"달이다." 과연 서쪽 하늘 끝에 초승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승호야.. 내일부터 또 달 보러 나가자." 하고 제가 말했지요.
다음 날 퇴근하면서 보니까 초승달이 보여서 승호를 데리고 달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주차장에 나가서 보니까 달이 없어진 거에요. 승호도 "어? 나도 아까 봤는데 어디 갔지? 구름이 끼였나?" 하고 어리둥절해합니다. 학교 다닐 때 배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달은 매일 약 50분씩 늦게 뜬다고 했습니다. 지금이 초승달이니까 아직은 뜨는 시각이 빨라서 그만큼 지는 시각도 빠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아까 떠 있던 각도를 생각하면 벌써 졌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서쪽에 있던 아파트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저거다.. 저 놈 땜시 달이 안 보이는 걸거야..'
저는 승호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 정문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그 건물 옆으로 돌아서면서 지평선 근처의 하늘을 보았죠. 저의 예상대로 조그마한 초승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붉은 색이 묘하게 감도는 달이었습니다.
다시 관찰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역시 쌍안경으로 달을 관찰한다는 것은 5살짜리 꼬마에게는 무리인가 봅니다. 한참 헤매다가 찾았는가 하면 잠깐 보이다가 또 없어지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승호가 지친 것입니다. 아무래도 달을 제대로 관측하려면 승호가 좀 더 커서 쌍안경을 제대로 지지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질 때까지 기다리던가 아니면 지지대가 있는 천체 망원경을 구입하거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승호는 달의 크레이터를 보지 못했으며, 쌍안경으로는 달을 관측하기가 쉽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제대로 보았다고 해도 눈으로 보는 것 보다 특별히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운 셈입니다. 거의 한 달 간에 걸쳐 띄엄띄엄 달을 관측하고 나서 지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승호가 아빠와 함께 망원경을 들고 달을 본다고 분주하게 보냈던 시간을 좋은 추억으로 깊이 간직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 달 프로젝트는 성공이라고 자체 평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승호 아빠 : [email protected]
(승호는 97년 3월생 남자아이로 01년 9월초부터 집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덧붙임) 10월의 어느 일요일 밤, 교육방송에서 우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그거 보다가 제가 잠시 채널을 바꾸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승호가 자기 방에서 튀어 나오면서 "아빠.. 그 해 나오는 곳으로 다시 바꿔요." 그러는 겁니다. 전 승호가 방안에서 마루에 있는 TV를 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승호는 제 앞에 앉아 태양과 수성에 대해 보더니 아직 프로그램이 끝나지 않았는데 다시 방으로 들어갑니다. 잠시 후 프로그램이 끝나서 채널을 바꾸었는데 승호가 방에서 또 소리 칩니다. "아빠.. 바꾸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과연 보고는 있었던 건가요?
승호가 그 프로그램을 끝까지 진지하게 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과학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커져 간다는 것이지요. 뭐 자꾸 물어볼까봐 겁나네요..
| 아들과 함께 영어를 22 : Observing the m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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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승호아빠 등록일 2001-12-03 08:35 조회수 1,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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