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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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극 이야기
아이들은 늘 연극을 합니다. 엄마, 아빠 앞에서 재롱을 피우는 것도 연극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유치원에서 배웠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하고 TV에서 보았던 개그맨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연극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인류 문명의 태동과 함께 연극이 함께 출현했고 그 후로도 계속 인류에게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왔다고 합니다.
1월 26일, '팥죽할멈과 호랑이' 연극을 온 가족이 함께 보고 왔습니다.
승호는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어린이 연극을 몇 번 보고 온 경험이 있었지만 저나 승호 엄마는 어린이를 주 대상으로 하는 연극을 관람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배우들도 열심히 하고 연극 특유의 현장감도 좋았고, 아이디어도 훌륭하더군요. 전 연극의 맛을 현장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눈 바로 앞에서 배우들이 노래하고 춤도 추고 말하는 것을 보면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느낌이지요. 아마 승호도 그런 느낌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처럼 가만히 앉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배우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관객들이 한 마음이 되어 연극에 참여하기도 하는 경험(이 연극의 경우는 같이 노래 부르기, 팥죽할멈이 도망간 방향을 반대로 호랑이에게 가르쳐주기 등이 해당되겠죠? 보신 분은 다 아실 겁니다. 아이들의 반응을)은 아이들의 균형된 성장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팥죽할멈과 호랑이'를 보면서 연극이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특히, 제가 흥미를 느꼈던 것은 바로 음악과 음향 효과입니다. 극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배우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바로 옆에서 키보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도구를 활용해서 진행에 필요한 소리들을 만들어내는데 참 재미있더라구요. 어쩌면 그렇게 적절한 소리들을 잘 만들어내는지.. 아이들로 하여금 그 배우를 눈여겨 보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연극 역사를 보면 연극의 이런 종합예술적 측면을 없애려 한 사람도 있더군요. 무대장치도 없애고 음악도 없애고 조명도 없애고 말입니다. 폴란드 사람 예지 그로토프스키(지금도 살아있답니다)가 바로 그런 연출가인데 그렇게 다 없애고 만든 자신의 연극을 '가난한 연극'이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유행은 돌고 도나 봅니다. 아주 옛날 연극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연극이었습니다. 무대장치니 음악이니 조명이니 이런 것들을 준비할 수 있는 기술 수준이 되지 않았을테니까 말입니다. 로마 시대까지는 옷을 입지 않고 하는 연극도 있었다고 합니다. 진짜 가난한 연극이지요(하기사, 요즘도 훌러덩 벗고 하는 연극들이 있긴 하지만요. 이것도 유행의 돌고 도는 현상 중 하나인가요?).
원작인 '팥죽할멈과 호랑이'는 전래동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연극에 등장하는 노래와 춤에는 우리 것이 많이 녹아있었습니다. 팥죽할멈이 김을 매면서 부르는 노래나 호랑이가 춤을 추는 모습에서 바로 민요와 탈춤 형식의 춤이 등장했지요.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웠던 고대의 각종 제천의식(동맹, 영고 등)이 바로 춤과 노래로 구성된 원시 연극의 형태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가면극, 판소리 같은 장르가 실은 우리의 연극 형태라고 하니 '팥죽할멈과 호랑이'를 보면서 옛날 우리 조상이 보던 연극을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겠지요?
서양에서도 연극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합니다. 서양 문명의 토대를 이룩한 그리스 시대에 이미 연극은 인기 장르였나 봅니다. 당시 유명했던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연극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세익스피어죠. 세익스피어가 활약하던 시기가 르네상스 시대가 막 끝나가면서 바로크 시대가 열리던 때였다는데 바로크 시대는 연극의 전성기였다고 하네요. '인생은 연극이다' 와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이 극에 올려졌다고 합니다.
현대에 이르러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연극계는 굉장히 위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위 벗기기 연극이 등장하기도 하구요, 역량 있는 배우들은 가난한 삶을 견디다 못 해 영화나 TV로 활동 무대를 옮기기도 하지요(권해효, 유오성 같은 인물이 퍼뜩 떠오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신문에 가족연극(가족연극이라는 말을 썼더군요)이 침체된 우리나라 연극계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사가 실렸었지요. 그 기사에 바로 '팥죽할멈과 호랑이'를 기획한 극단 '사다리'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확실히 요즘 가족연극이 전성기 같아요. 여기 쑥쑥에만 와봐도 이런 연극, 저런 연극한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잖아요.
자, 다시 돌아가서, 연극을 보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전 승호랑 떨어져서 맨 끝자리에 앉아서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는 승호가 잘 안 보이는 바람에 연극을 보는 동안의 승호 반응을 살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승호 엄마 말을 들어보니까 승호가 연극 보는 것에 굉장히 집중했으며, 노래도 따라 부르면서 즐거워했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승호는 절구 아저씨와는 인사를 잘 했는데 호랑이 아저씨에게는 가지 않더군요. 6살이나 된 녀석이 글쎄 무서워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거 참..
2. 아이에게 뭐든지 가르쳐주기?
연극 관람을 마치고 극장 바로 위층에 있는 델리 카레 음식점에서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저녁 식사 중에 승호 엄마가 그러더군요.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무슨 일인데?"
영문을 모르는 저는 물어볼 수 밖에요. 승호 엄마는 대충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연극을 보는데 승호 엄마 옆에 승호 보다 조금 어린 듯한 아이가 한 명 앉았답니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되면서 그 아이의 엄마가 계속해서 아이에게 말을 건다는 거였어요. 가령, 본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공연되었던 '무엇이 될까' 연극에서 훌라후프로 애벌레를 만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이 나오자마자 엄마가 아이에게 '저건 애벌레다' 하고 말하고, 나비를 만들면 '저건 나비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데요.
승호 보다 조금 어린 아이라면 어느 정도는 큰 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그 엄마는 일일이 설명을 해주어야 했을까요? 아이에게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가정 하에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건 '조급함' 때문이 아닐까 싶더군요. 또 그런 모습을 보고 저와 승호 엄마는 '극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극성'과 '조급함'은 상당히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애벌레를 표현하는 배우들을 보고서 애벌레 라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될까요? 아이는 그냥 '야, 예쁘다' 또는 '저거 용수철인가보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애벌레' 라는 정답을 못 맞추었다는 이유로 가치 없는 생각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아이가 하는 생각인데 말이죠. 그런데, 그 엄마의 경우는 그런 생각조차 할 기회를 아이에게 주지 않았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엄마의 행동을 이끌어낸 마음 속에는 '어서, 아이에게 가르쳐주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조급함'이죠. 옆에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극성'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거구요.
아이가 아이 때 누려야 할 권리나 기쁨을 뺏고자 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빨리 해보자는 생각이 깔려있는 부모의 말과 행동에 의해 아이들은 그것들을 뺏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좋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그런데, '극성'이라는 극한 단어를 이런 경우에 사용해도 무방할까요?
3. 연극을 보고 난 후 승호의 반응
게시판에 보니 이 연극을 보고 와서 아이들 반응이 너무 좋았다, 또 보고 싶어한다, 무엇이 될까 놀이를 흉내낸다 와 같은 글들이 올라와 있더군요. 그러면, 승호는 어땠을까요? 승호도 물론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재미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떤 후속 반응도 보이지 않더군요.
연극을 본지 한 열흘 쯤 지나고 나서 우연히 연극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때다 싶어 그 전까지 한 마디도 묻지 않았던 '팥죽할멈과 호랑이' 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승호야.. 너 그 연극 다시 보고 싶지 않니?"
"..."
승호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보고 싶다면 분명 대답했을텐데 대답이 없다는 것은 별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잠시 조용하더니 승호가 말문을 엽니다.
"난, 탑 블레이드가 다시 보고 싶어. 난 탑 블레이드만 좋아."
에구, 고 놈의 탑 블레이드가 또 나오는군요.
일주일에 두 번씩 방영하는 탑 블레이드를 늘 보고 있고, 또 가끔은 녹화해서 두 번씩 보기도 하면서 또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허탈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승호에게는 '팥죽할멈과 호랑이' 연극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탑 블레이드'의 재미에는 못 미치는 것입니다.
저희 부부의 생활 패턴 상 저녁 때 방영하는 TV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승호를 완전 노출시킬 수 밖에 없는데, 엄마 아빠를 기다리며 보던 '탑 블레이드'에 승호가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좀 진정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이럴수록 '팥죽할멈과 호랑이' 같은 연극도 보여주고(재미있어 하니까요), 바깥으로 놀러도 자주 가는 식으로 다른 재미거리도 계속 접해주어야 겠습니다.
하여간 한 군데에 빠지니까 무섭네요.
너무 팽이 놀이만 하는 것 아니냐고 제가 가끔 이야기하면 승호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빠도 좋아하는 것만 하잖아."
"아빠가 언제?"
"아빠도 컴퓨터, 테니스, 책 읽는 거만 하잖아.."
할 말이 없더군요...
승호 아빠 : [email protected]
(승호는 97년 3월생 남자아이로 01년 9월초부터 집에서 영어를 접하고 있습니다)
덧붙임) '연극이 희희낙락 (2000년, 명로진 지음, 주니어 김영사)' 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연극에 대한 지식을 좀 빌려왔습니다. 이번 글의 참고문헌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청소년 대상 책이라 그런지 삽화도 재미있고 내용도 쉽습니다. 연극에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 보세요. 저도 이번에 연극을 관람한 후 연극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서 읽었습니다. 3900원 입니다. 하여간 아이를 키우다보니 오히려 제가 영어 공부도 하고 연극 역사도 공부하게 되네요.
오늘은 이 책에서 읽은 연극에 관련된 말의 어원에 대해 말씀드리고 끝을 맺겠습니다. '막간(幕間)을 이용한다'는 말 있잖아요. 그 때 막간이라는 것이 진짜로 연극의 1막, 2막과 같은 막 사이의 시간을 의미한답니다. 옛날에는 무대장치 등을 바꾸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와 같은 막간에 관객들이 지루해하지 말라고 새끼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는 본 공연 보다 막간 공연이 더 인기 있기도 했다네요.
또 하나, '각광(脚光)을 받는다'는 말 있지요? 왜 스폿 라이트(spot light)라는 것이 있잖아요. 다른 곳은 어둡게 하고 한 배우만을 집중적으로 비추는 조명이요. 옛날에는 이 조명을 배우의 발 아래 쪽에서 비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foot light(각광)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각광을 받는다는 말의 어원을 알고 나니 이 말이 지금도 참 적절하게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쓰는 말 중에는 우리 인류 역사와 함께 성장해온 연극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곧 설 연휴입니다. 어차피 오고 또 지나갈 날이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무사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37회 다이어리 : 팥죽할멈과 호랑이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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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승호아빠 등록일 2002-02-08 08:53 조회수 1,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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