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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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가만히 보니 승호가 탑 블레이드 보는데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지 않더군요. 승호 손에는 로봇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왜 손오공이라는 완구회사에서 만들어낸 커다랗고 비싼 로봇 있잖아요. 이제 시시하다고 로봇들을 가지고 놀지 않는 승호 사촌이나 제 친구 아이로부터 얻은 것들 중의 하나인데 승호는 아직까지는 로봇에게 그다지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날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탑 블레이드 만화를 보면서 동시에 로봇 놀이를 하고 있다는거 아닙니까.
'음.. 이제 로봇에 빠질 차례가 왔는가?'
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승호가 로봇의 부품을 끼워달라고 부릅니다. 하여간 이놈의 로봇이나 디지몬 인형이나 탑 블레이드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달라는 것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처음 할 때는 너무 어렵더라구요. 옛날 어렸을 때는 저도 분해 조립을 잘 했던 것 같은데 이제 손도 굵어지고 이해력도 쇠퇴되고 해서 잘 안되더라 이 말씀입니다. 승호 엄마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저희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승호가 '이것 좀 끼워 줘' 또는 '이것 좀 빼 줘' 하고 장난감을 들고 오면 호통을 치기 일쑤입니다.
"승호야.. 네가 못 하면 분해하지 마" 하는 식으로 말이죠.
하여간 야단맞은 덕분인지 몰라도 승호는 이제 탑 블레이드 같은 경우 힘이 달려서 안 되는 경우를 빼고는 능수능란하게 분해와 조립을 해댑니다.
"승호야.. 오늘 어린이집에 로봇 가지고 갔니?"
"아니.. 친구들이 가지고 와서 로봇 가지고 놀았어"
"그랬어?"
"엉, 내일은 내 것도 가지고 가서 놀거야"
아하! 승호는 내일 가지고 갈 로봇들을 점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날 승호는 탑 블레이드를 가지고 어린이집에 갔었는데 대세는 탑 블레이드가 아니고 로봇이었나 봅니다. 거대한 변신 로봇을 정비하느라고 제가 퇴근하기 전에 승호 엄마가 한 차례 홍역을 치른 모양입니다. 전 그 로봇이 우리 집에 올 때부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로봇에 관한 한 담당자는 승호 엄마가 되어 버렸거든요. 자동차에서 로봇으로 변신하고 두 개의 로봇이 하나의 로봇으로 합체되는 과정을 저는 모르는데 승호 엄마는 알고 있습니다(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알게 된 거죠. 전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밤이 깊어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승호는 치카치카하고 얼굴 씻고 나서 제 방에 있던 저에게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승호를 방의 침대로 데리고 가다가 현관 앞에 놓여있는 로봇이 담겨있는 쇼핑 백을 보았습니다. 내일 잊지 않고 가져가려고 미리 현관 앞에 두었나 봅니다.
침대에 누운 승호에게 제가 그랬습니다.
"승호야.. 아빠도 어렸을 때 로봇 참 좋아했었어."
"정말?" 승호 얼굴이 훤해집니다.
"그럼.. 아빠는 로봇 태권 브이나 마징가 제트를 좋아했지. 넌 무슨 로봇 좋아하니?"
"엉. 나는 xxx(무슨 로봇인지 못 알아듣겠더라구요. 무슨 만화에 나온다고 하는데요)"
"로봇 태권 브이 노래도 있어. 내가 한 번 불러 볼까?"
"응"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 브이,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두 팔을 벌려 앞으로 가면.." 이쯤 되니까 가사가 생각나지 않더군요. 그렇게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도 생각이 나지 않다니 정말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나 봅니다.
그런데 말이죠. 제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승호의 눈이 얼마나 초롱초롱 빛나는지요... 그리고, 승호 얼굴에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하면서도 흐뭇해하는 표정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승호와 제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이 진하게 다가오더군요.
'아빠도 나처럼 로봇을 좋아했구나..' 하는 승호의 생각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승호야, 내일 아빠가 로봇 태권 브이 그림 그려줄게. 너도 네 로봇 그려 줄거지?"
"아빠, 난 그리지는 못 하고 로봇 장난감 보여줄게" 합니다.
로봇 태권 브이 그림, 어렸을 때 정말 많이 그렸습니다. 설계도를 그린답시고 반은 로봇의 내부를, 반은 외부를 그린 그림을 특히 좋아했고 또 많이 그렸었죠.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림 그리는 것도 잊어버렸을라나요?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연세대의 김주환 교수가 쓴 글(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갔니?, 민음사, 2001년 중에서 '포켓몬스터와 산해경')이 생각납니다.
디지털 컨텐츠는 복사가 무한히 된다. 지금부터 천 년이 지나 우리 후손이 보는 동영상이나 지금 우리가 보는 동영상이나 똑 같다. 반면 지금 우리가 보는 조선시대 그림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던 것과는 다르다. 흘러간 시간에 따라 변한다. 하지만 디지털 콘텐츠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도 않고 원본과 복사본에 차이가 없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였습니다(글의 원본을 그대로 쓴 것이 아닙니다. 생각나는 대로 요점만 적었습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 후손들은 그들의 후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훨씬 쉬어진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승호가 디지몬에 열광했는데 나중에 결혼을 하여 자기 자식에게 디지몬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요?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디지몬이 동영상으로 막 튀어 나올 것 아닙니까.. 원본인지 복사본인지 모를 디지몬들이 말이죠. 하기야, 로봇 태권 브이도 지금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그림이 뜹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우리 세대는 산업혁명 이상으로 커다란 질적 변화를 이루고 있는 인류 역사의 대 전환점 한 가운데를 살아가고 있는 역사적 증인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특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모두 인터넷을 어느 정도 활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도도한 역사적 흐름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약간 빗나갔나 모르겠는데 결론은,
로봇을 통해 아들과 공감대를 형성했을 때의 그 느낌이 참 좋았다는 겁니다.
앞으로 승호가 더 자라고 동시에 제가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또 무엇을 매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궁금해집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어렸을 때 좋아하던 것을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한다면 "엄마(아빠)도 어렸을 때 그거 굉장히 좋아했어" 하고 한 마디 건네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의 재미있는 표정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승호 아빠 : [email protected]
(승호는 97년 3월생 남자아이로 01년 9월초부터 집에서 영어를 접하고 있습니다)
덧붙임) 설날 지나서 며칠간 승호가 저희 방에서 같이 잤습니다. 원래 승호는 자기 방에서 혼자 잤었거든요. 사실, 혼자 잔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밤에 자다가 깨서 엄마를 찾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보면 엄마랑 같이 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승호 침대가 1인용이라서 승호 엄마는 거기서 쪼그린 자세로 자고 나면 늘 허리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또, 승호 방은 외풍이 세서 겨울이면 좀 춥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승호가 저희 방에서 한 사흘 정도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안방의 침대는 2인용인데(당연하겠죠?), 조그만 승호 한 명이 더 눕는 것 정도는 커버해주더라구요.
첫 날에는 자다가 조금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어 깨보았더니 승호 다리가 제 목에 올라와 있는 등 적응이 잘 안되었는데 둘째 날 부터는 괜찮더군요. 쌕쌕거리는 승호 숨소리 들으면서 자는 것도 좋구요.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우리 세 사람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어요. 전에는 인사하고 나서 승호와 승호 엄마는 승호 방으로 들어가고 저 혼자 그 넓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조금 쓸쓸함을 느꼈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요즘은 제가 승호 때문에 제대로 못 자는 것 같다고 판단한 승호 엄마가 다시 승호를 승호 방에서 재우고 있습니다. 승호는 과연 어떤 잠자리를 더 편하게 느낄까요?
제39회 다이어리 : 공감대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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