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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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에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에 갔었습니다. 원래는 좀 멀게 에버랜드에 갈까 했었지만 아직 날씨가 완전히 풀린 것도 아닌데 그 넓은 곳을 돌아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고 게다가 사실상 3일 연휴가 되어 길도 많이 막힐 것 같아 가까운 곳으로 방향을 튼 것이지요. 그 날은 참 날씨가 좋았습니다. 바람도 별로 불지 않고 따뜻한 것이.. 게다가 공원에 도착해서 보니 그 날이 삼일절이라고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웬 횡재냐 했지요.
저희가 12시쯤에 갔었는데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동물들 구경하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 날 본 동물들 중에 기억에 제일 남는 것이 백곰과 원숭이입니다. 흰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지저분한 노리끼리한 색의 털을 가지고 있던 그 백곰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시종일관 왔다갔다하면서 움직이는 거에요. 제가 "야, 저래서 저 녀석이 저렇게 날씬하구나" 했더니, 승호 엄마가 옆에서 "날씬하다 못 해 마른 것 같은데?" 하고 되받아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원숭이. 창살에 매달려서 어떤 아저씨가 던져주는 홈런볼 과자를 한 손으로 턱턱 받아 먹던 그 원숭이가 생각납니다. 승호 엄마는 그 녀석을 자세히 보더니 홈런볼의 초콜릿은 빼고 과자 껍질만 먹는다고 지적하더군요. 거 참, 단 것을 좋아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그 아저씨처럼 원숭이에게 과자를 주고 싶어하는 승호를 말리느라 힘들었습니다. 제가 동물들에게 과자를 주면 안 된다고 가르쳤는데 어른이 그러고 있으니 그것을 본 승호가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 아닙니까. 이럴 때는 뭐라고 설득을 해야 하는지 원..
그건 그렇고 옛날에는 무서워서 동물 근처에 가지도 못 했던 승호가 이번에는 염소를 직접 만지기도 하더군요. 흘러가는 세월 따라 자라는 아이를 보자니 신기합니다. 동물 구경을 다 하고 나서 놀이동산으로 갔습니다. 어린이대공원의 놀이동산은 규모도 작고 오래된 시설들이라 사실 별로 탈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었고 승호 생각은 달랐나 봅니다. 결국, 승호가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놀이 기구를 탄 것은 그 날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타고 놀았죠.
그렇게 놀고도 뭐가 아쉬운지 계속 더 놀자고 하는 승호와 동물원을 한 번 더 구경하고 나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 부터입니다.
하루 종일 노느라고 피곤했을 승호를 재우고 나서 저희 부부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승호 엄마가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아까.. 놀이기구 타려고 줄 서서 기다릴 때 기다리는 사람들을 봤거든? 그런데, 아빠들치고 얼굴에 행복한 표정 짓는 사람이 없더라..."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것을 느꼈거든요. 아이들은 곧 타게 될 놀이 기구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흥분해있는데 그 옆에 서 있는 아빠들의 얼굴 표정은 삶에 찌든 지친 표정들이었거든요.
"엄마들은 괜찮았어?" 하고 제가 되물었습니다.
"응, 상대적으로. 엄마들은 그래도 밝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많더라고. 왜 그럴까?"
"전에 어디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남자보다 여자가 더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는 거야. 가부장사회인 우리 사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의외의 결과 아닌가? 권력을 쥔 남자들이 더 행복해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고."
"글쎄, 엄마들 표정이 그래도 나은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오랜만에 남편, 아이들과 함께 공원에 나온 것 자체가 기쁜 거지."
이 대목이 사실이라면 정말 슬퍼지네요. 평소에 남편과 함께 공원에 올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기회를 잡아 나온 것 자체에 대해 기뻐한다는 이야기니까요.
"한국 남자들이 이렇게 가족과 함께 놀러 나와서도 우거지 상을 하고 있는 이유는 대강 이런 거 아닐까. 가족을 먹어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 말이야. 그 때문에 사회에서 끊임없는 경쟁을 해야 하고, 퇴출을 걱정해야 하고 말이지. 엄마들이 직장 다니거나 전업 주부 생활하는 것도 힘들지만 아빠들이 겪는 고충과는 성격이 조금 다른 것 같아. 그리고, 또 이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데 아빠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든. 살아야 되기 때문이지. 적성 따질 여유가 어디 있겠어? 이런 것들 때문에 늘 피곤한 것 아닐까?"
"아무튼, 놀러 나와서 즐기지도 못 하고.. 불쌍해. 우리 사회가 크게 잘 못 된 것 같아."
"맞아. 선진국에 가 보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굉장히 밝거든?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안 그래. 내가 출, 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사람들 표정을 가끔 살펴보거든? 그런데, 진짜로 없어. 밝은 표정의 사람이. 그나저나 오늘 공원에서 나는 어땠어?"
"응? 내가 오늘 아침에 물어 봤잖아. 피곤하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도 자기는 괜찮았어. 그리고, 엄마들도 잘 못이야. 남편이 피곤한 것 같으면 그냥 쉬게 놔두는 것이 어떨까? 억지로 끌고 나오지 말고 말이야."
이 대답은 저 역시 표정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삼일절 전에 지방 여러 곳으로 출장을 다녀 온 저는 사실 몹시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가 종전에 하던 것과는 사뭇 성격이 달라 굉장히 긴장되어 있는 상태거든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도 공원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 회사 생각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요즘은 꿈에 회사 일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아! 끔찍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가끔 놀랄 때가 있습니다. 승호 엄마가 생각하는 깊이에 대해 말이지요. 아침에 피곤하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승호 엄마가 했을 때 전 반대로 생각했었습니다. 꼭 가야 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이제 말을 듣고 보니 승호 엄마는 제가 피곤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놀러 가서도 즐길 상태가 아니라면 집에서 쉬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한 그대로 말을 한 것이었는데 제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저와 승호 엄마는 가치관이나 취향이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논쟁으로 치닫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랑 생각이 같다면 더 좋을텐데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더 재미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난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야기해보니 상대는 여기 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의 재미가 상당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논쟁에 승호가 방해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이서 이야기하는 도중에 조금만 톤이 높아지면 승호가 "싸우지마. 악수해" 하고 끼어들기 때문이죠. 아마도 진짜로 부부싸움 했을 때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승호가 기억하고 있나 봅니다. 하여간 애가 보는 앞에서 싸우는 것은 정말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사항은 놀러 가서 아빠가 우거지 상을 하고 있으면 '아빠가 나랑 놀러와서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구나' 하고 아이가 느낄 거라는 겁니다. 이는 비단 놀러 갔을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죠. 아이랑 놀아줄 때 부모가 즐거워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그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고,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보다' 하고 아이는 생각하게 되겠지요. 아이가 이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요즘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승호를 건성으로 대한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되네요. 새 학기를 맞이하여 어린이집에서 반과 선생님이 바뀌어 승호가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거든요. 이럴 때 일수록 더 자상하게 대해주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 하고 있으니..
이제 나들이하기에 좋은 계절이 곧 올텐데, 언제쯤 우리 아빠들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놀이 공원을 거닐게 될까요?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아빠, 엄마, 그리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해야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승호 아빠 : [email protected]
(승호는 97년 3월생 남자아이로 01년 9월초부터 집에서 영어를 접하고 있습니다)
덧붙임) 어제는 승호 생일이었습니다. 퇴근 후에 승호가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먹으러 집 근처의 이태리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스파게티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지요. 저희가 승호에게 준 생일 선물이 뭔지 아세요? 바로 Reader Rabbit CD입니다. 전에 쑥쑥에서 공구할 때 3장을 샀었는데 preschool은 이미 많이 가지고 놀았고(31회 다이어리 글에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어제 생일 선물로 Kindergarten을 준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1st Grade는 어린이날 선물로 줄까 합니다. 한 번 사서 잘 써먹지요? (^_^)
| 제40회 다이어리 : 놀이공원에서의 아빠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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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승호아빠 등록일 2002-03-05 12:20 조회수 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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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다이어리 : 놀이공원에서의 아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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