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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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에 가면 으레 그렇듯이 처음에는 하나의 치아 때문에 갔는데 나중에는 몇 개의 치아를 다 건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어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치과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전 치과와 인연이 많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치과에 무지 다녔지요. 그 결과 지금 제 입안을 들여다보면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화려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보철물들의 사용 연한이 다 되었나봅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몇 십년씩 사용한 것들도 꽤 되니까요.
요즘 제 이를 치료해주는 의사 선생님은 다름 아닌 제 친구입니다.
"야, 요즘 내 이 상태가 이러이러한데 어떤 거 같냐?" 하고 전화로 물어보았다가 코 꿰어 친구 병원으로 다닙니다. 여기서 코 꿰었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 병원이 굉장히 멀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이 서울의 올림픽공원 근처인데 그 병원은 군포에 있으니 정말 멀지요? 대략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토요일 오후 전철에 몸을 싣고 책이나 보면서 쉬엄쉬엄 가기 때문에 뭐 그렇게 억울한 것은 없지만 조금 귀찮기도 합니다. 그런데, 올 때는 그 친구 집이 잠실 근처라서 차를 얻어 타고 같이 옵니다. 결국, 그 친구가 일 다 끝내고 퇴근할 때 함께 오는 거죠.
사실, 멀어서 귀찮다는 점만 빼고는 다 좋지요. 믿을 수 있어서 좋고 또 어마어마하게 DC를 해주어서 좋고(할인율은 비밀입니다), 친구랑 옛날 이야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하면서 같이 차 타고 올 수 있어서 좋고.. 좋은 점이 어디 한 두 가지뿐이겠습니까?
바로 지난 주말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새로 금니를 하나 박아 넣고 두 개의 금니를 더 하기 위해서 본을 뜨고 스케일링까지 하는 등 다양한 치료를 받았습니다. 자연 치료 시간이 길어져서 진료 시간인 오후 4시가 넘어서까지 치료가 계속되었지요. 친구는 간호사들에게 먼저 퇴근하라고 일렀습니다. 요즘은 근무 시간 개념이 확실해져서 퇴근 시간이 되면 정확히 퇴근시켜야 한다더군요. 더 하겠다는 간호사도 없고 더 하라고 이야기하는 원장도 없답니다.
아무튼 저랑 친구만 덩그러이 남아서 치료를 계속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병원 문이 열리더니 여고생으로 보이는 여자와 그 학생의 아빠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들어왔습니다. 친구는 당연히 진료가 끝났다고 이야기했지요. 벌써 4시 30분이 다 되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아저씨 왈, "이가 아프다고 하는데 그냥 약이나 하나 주세요." 그러더라구요. 순간, 친구 얼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이 보였는데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봐 드리겠습니다."
그 여학생은 그날 제 친구가 봐주지 않았다면 밤새 아픈 이를 감싸안고 고생했을 거라고 합니다. 신경 치료까지 해야 했을 정도였다니까요. 친구 말이 그 정도 상태라면 분명 그 전 날부터 많이 아팠을텐데 아빠가 병원에 억지로 데려오기 전까지 그냥 버텼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요? 그 여학생의 아빠 역시 '약이나 하나 주세요' 하는 다소 성급하면서도 월권적인(?) 발언을 내뱉었다가 의사의 기분을 나쁘게 한 것입니다. 의사가 진단하기 전에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참고로 이 아플 때 갈 수 있는 응급실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이나 턱이 부러졌을 때 응급 처치해주는 병원은 있지만 신경 치료를 포함한 일반 치과 진료를 해주는 곳은 잘 없다고 하네요. 휴일이 끼여 있는 때에 이 여고생 만약 병원에 오지 않았으면 그야말로 생지옥을 경험할 뻔 한 거지요. 치통의 고통은 겪어 보신 분들은 다 알 것입니다.
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동안 병원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의 내용인 즉, 아이의 이가 부러졌는데 치과 병원이 다 문을 닫았다는 거지요. 어쩌겠습니까.. 친구는 어서 오시라고 이야기했지요. 자,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진료 시간은 이미 1시간이나 지났는데 계속 급하다고 하면서 환자들이 오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보조를 할 수 있는 간호사들은 다 퇴근한 상황에서 말이지요. 저도 덩달아 집에 가지 못 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5살짜리 아이가 왔습니다. 롤러 블레이드를 타다가 학교 교문에 부딪쳐서 앞니 하나가 부러진 상태였습니다. 아이 엄마는 화도 나고 걱정도 되어 몹시 상기된 표정이었는데, 이 부러진 자기 아이를 빨리 봐 주지 않고 앞의 그 여고생을 보고 있는 제 친구를 조금은 초조한 표정으로 쳐다 보더군요. 아이는 부딪치고 나서 아프고 놀란 마음에 많이 울어 지쳤는지 기다리는 동안 잠이 들었습니다. 제 친구는 아이 엄마에게 큰 병원의 응급실로 일단 가시지 그랬냐고 한 마디 했습니다. 그 엄마는 전화번호부에 나와있는 치과 병원에는 다 전화를 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왜 이렇게 병원들이 일찍 문을 닫는지 야속하게 생각했겠지요. 아무튼 의사와 환자 보호자간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형성되고 있음을 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이 몸을 묶고 치료가 시작되었는데, 아이 몸부림이 상당하더군요. 급기야는 제가 동원되었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돌리지 못 하도록 얼굴을 꽉 쥐고 집게 같이 생긴 기구 하나를 입에 넣어 입을 못 다물게 했습니다. 엄마는 아이 몸을 붙들고 있었으니까 무려 세 사람이 붙은 셈입니다. 제 친구는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수 년간 일한 그 방면의 베테랑입니다. 게다가 구강외과 전공이라 수술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치료는 쉽게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보조사도 시원찮고(저 말입니다), 진료 시간이 다 끝나고 난 후에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많이 지친 상태에서 하는 시술이라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이가 너무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제가 잡고 있던 집게를 놓쳤고 뒤이어 제 친구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악이 오른 아이가 친구의 손가락을 물어 버린 것입니다. 제가 다 아찔 하더군요. 저는 이런 일을 처음 하다 보니 움직이는 아이를 모질게 꽉 잡지 못 했는데 그 결과 친구가 다치고 만 것입니다. 피가 나오는 이의 조각을 뽑아 내는 거며, 신경들을 끄집어 내는 장면을 직접 보고 있자니 떨리기도 하구요. 친구는 계속해서 아이 엄마에게 엄마가 놀라면 안 된다고 부탁하면서 시술을 했구요. 침착하게 아이를 진정시키려 애쓴 그 아이 엄마도 대단하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아이 치료가 다 끝났습니다. 다행히 이를 완전히 뽑지 않았고, 나중에 영구치가 나올 때 까지 사용할 수 있게 레진이라는 것으로 이 모양을 만들어서 덧붙여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저까지 동원되어서 그렇게 진료를 마쳤는데 진료비가 약 6천원이더군요. 물론 보험공단에 청구해서 돈을 다 받으면 3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만 솔직히 그리 충분한 보상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친구가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 엄마가 놀라서 경황이 없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갈 때 내 손가락 어찌되었는지 한 번 묻지도 않고 가잖아. 난, 응급 처치의 경우 부모로 하여금 웬만하면 치료 과정을 다 보게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말이 많아.. 급박하게 돌아간 상황을 다 보여 주어도 나중에 딴소리하는 사람이 많아. 이건 이럴 수 있지 않았느냐 하는 식으로 말이야"
음, 저도 의약분업 건을 보면서 의사들 욕 많이 한 사람입니다만, 이렇게 한 번 의사의 입장에서 일을 직접 겪고 나니까 그들의 고충도 이해가 조금 되는 것 같습니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가 그러더군요. 진료 하다보면 정말 짜증나고 비위 맞추기 힘든 환자들도 많지만(특히 어린아이들) 그 때 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자기 딸이라구요. 친구의 딸은 승호와 생년월이 같습니다. '내가 저 아이의 부모라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제가 늘 승호에게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승호야.. 네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면 안돼. 남이 너한테 뭐 하라고 했을 때 기분 나쁘거나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라고 하면 그 애도 똑같이 느끼겠지?' 6살 짜리 아이에게는 다소 어려운 말일수도 있지만 전 틈나면 그 이야기를 해줍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입장에서만 보면 불공정하게 생각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그리고, 자기 사정만이 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상대방이 이해가 되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경험상 알게 되었습니다. 크게 사회 생활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가까운 친구끼리, 아니 더 가깝게는 부부 사이만 생각해봐도 이러한 마음가짐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승호가 이런 마음가짐을 체질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승호 아빠 : [email protected]
(승호는 97년 3월생 남자아이로 01년 9월초부터 집에서 영어를 접하고 있습니다)
덧붙임) 참, 이 말씀 꼭 드려야지요. 평소에 이를 잘 닦지 않는 아이들에게 "너, 이 안 닦으면 나중에 치과 가서 치료받아야 되는데 그거 무지 아프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위의 그 아이도 평소에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왔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 온 아이가 급기야 치과에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무서웠을테고 더더욱 도리질을 한 것입니다. 사실 저도 승호에게 그런 식의 논리로 양치질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과에 갈 일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가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 뻔히 드러나는데도 저를 포함한 많은 부모들은 별 생각 없이 치과가 무서운 곳이라고 이야기하곤 하지요. 이것도 아이 입장에서 역지사지를 안 해서 그런 건가요?
그나저나 제가 요즘 경상남도 끝자락에 두 달의 일정으로 출장 와 있습니다. 주말에 잠깐 서울에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고 있지요. 그래서, 쑥쑥에 잘 오지 못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 동안은 그럴 것 같습니다.
이 곳에는 동백 꽃이 피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동백 사진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따뜻한 남쪽에서 이 사진과 함께 봄기운을 전하고 싶습니다.
울 애긴 잠자리에서 영어를 .....
제41회 다이어리 : 역지사지(易地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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