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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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쨍 하고 나서, 날이 밝고 따스할 때면, 마음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생각들이 모두 아지랑이를 피우면서 증발 해 버리기 때문인지, 아니면 햇볕의 신비한 힘으로 인해 한없이 엔돌핀이 생산되어서 부지런히 밀렸던 일들을 하느라 몸을 바쁘게 움직이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해가 나는 날은 머리 속의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는 대신, 온 몸으로 창문가에서 해만 나면 부지런히 광합성을 해서 붉은 색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에 바쁜 제라늄 같이, 나의 몸도 비슷한 합성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처럼 비가 대지로 소리를 내며 내리는 날의 경우는, 증발해서 구름으로 남아 있다가 비가 되어 다시 내 마음 속에 내려앉는 빗물처럼, 이미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러가지 기억들이 떠오르고 체온 때문인지 그 생각들이 부피를 늘리는 듯 하다. 그래서 괜히 여러가지 상념들에 젖어서 난 데 없이 일기도 쓰고 싶어지고, 속이 안 좋아서 한동안 끊었던 진하디 진한 커피 한 잔의 시간이 하루 종일 기다려지기도 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우중충 해서인지, 감기 기운 때문이었는지 그만 늦잠을 잤다. 부랴부랴 남편의 도시락을 싸기 위해 어젯밤에 담가 두었던 쌀을 불에 올렸다. 압력솥의 꼭지가 소리를 내며 뱅글뱅글 돌아갈 때 12분으로 막 타이머를 맞추어 놓았는데, 남편이 늦었다며 서둘러 집을 나선다. 급한 김에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냉동밥 한 봉지를 도시락 통에 다른 반찬과 같이 넣어서 싸 주었다.
떠나는 남편의 뒷모습도 바라볼 여유 없이, 오늘 잡힌 일에 시간을 맞추어 가기 위해 나도 서둘러 준비를 해야했다.
기쁨이는 아직도 한 밤중이고 자랑이는 언제나 부지런둥이. 벌써 깨서는 집안을 어슬렁 거리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부터 시작된 교사들의 파업이 오늘..그러니까 수요일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아무래도 협상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듯..이번 주는 그냥 방학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아이들과 집에서 뒹굴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야박하게 교육비 삭감을 무자비 할 정도로 강행했던 정부가 조금은 사죄의 뜻으로...아니, 이 나라 미래인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육에 조금 더 투자를 하고, 선생님들의 뜻을 헤아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바램이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기쁨이와, 자신의 아침식사를 스스로 챙긴다고, 계란을 지지고 밥과 국을 떠서 아침상을 준비하고 있는 자랑이를 뒤로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Lions Gate Bridge를 건너면서...아직은 옆의 바다를 유유히 감상할 정도의 여유가 없는 초보이지만...나는 생전 내 힘으로 운전해서 이 다리를 건널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이 다리를 실제로 지금 제법 여러 번 안전하게 건넜다는 것이 신기하다. 처음 두어 번의 시도에서는 온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고 두렵고 조심스러웠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그래도 해야 하느니라. 못 한다고, 무섭다고 주저 앉으면 평생 못 할 것이니..연습을 자꾸 해야지 나아지는 것이야. 한 두 번만 더 하면 잘 할 수 있어.'라는 말로 계속 나를 일깨워 주었다. 참 연습이라는 것은 신기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점점 높은 수준으로 올려준다.
한 시간으로 잡혀있는 통역 일은 단 15분 만에 끝났다. 자궁암 수술을 받으신 분의 수술경과 진찰이었다. 수술이 무척 성공적이었고, 발견 즉시 수술로 제거를 했기 때문에 재발의 위험도 거의 없다는 희소식을 듣고 전할 수 있어서 기분이 참 좋았다.
라디오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계속 엄청나게 궂은 날씨가 이어질 것이라며, 이 짙게 깔린 구름들이 마치 으름짱을 놓는 듯하다고 아나운서들이 호들갑을 떨었었는데...오전 11시가 다 지나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는 길에 한국마켓에 들러서 풋배추를 한 포기 샀다. 요즘의 풋배추는 '풋'자가 어색할 정도로 크고 두터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혹시 철이 지나서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마침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집에 끓여놓은 사골국에 데친 풋배추를 된장에 무쳐서 사골 우거지국을 저녁에 하려고 계획했었다.
집에 돌아와서 곧 점심시간을 가질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냉동밥은 따뜻하게 전자렌지에 데워 먹으라고..
자랑이는 어제 나가서 산 할로윈 의상을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빨리 할로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또 한다. 점심으로는 어제 밤에 만들어 놓았던 맵지 않은 마파두부 밥을 주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주어서 또 기분이 좋았다.
내 아이들이 바로 천사들이구나..너무나 사랑스러운 내 새끼들...이라는 생각을 막 하기 시작하는데, 이 녀석들이 불평을 시작한다. 배는 부르지, 학교도 안 가지, 밖은 비가 오기 시작하지, 밖에 놀 친구도 없지, 엄마가 텔레비젼도 그만 보라 하고, 컴퓨터는 다 막아 놓았지. "Boring, boring, boring!!!"을 엄마 들으라고 계속 반복한다..큰 소리로.
"자, 빈 병 모아서 갖다 팔자. 그리고, 도서관에 책 반납하고 새 책 빌려오자. 엄마는 빨래를 해야하는데, 1불짜리 동전이 필요하니까, 은행에 들러서 동전도 좀 바꿔 오자...그 전에, 자기 방 정리하자."
나의 이 선언에 아주 극렬하게 반대 의견을 보이는 아이들. 그 반응에 아랑곳 않고 나는 걸레를 두 개 빨아서 각자의 방 정리 후에 바닥을 걸레로 닦을 것까지 주문을 했다. "은행에는 안 갈래요. 동전이 필요한 사람은 엄마니까 엄마가 가세요. 빈 병을 모아서 파는 것도 엄마 일이쟎아요. 도서관에도 가고 싶지 않아요. 빌리고 싶은 책도 없고, 컴퓨터도 엄마가 못 쓰게 하기 때문에, 도서관 웹사이트에서 내가 빌린 책이 뭔지, 돌려줘야 할 책이 뭔지도 확인을 할 수 없어서 도서관에도 갈 필요가 없어요."
"엄마가 빨래를 다 해 주는데, 동전 바꾸는 데 같이 가 주면 안 되니? 그리고 빈 병들은 다 너희들이 마시고 난 음료수 병들인데, 엄마가 음료수를 사 주고, 병까지 모아 주었으면, 병을 파는 일은 너희들이 해도 되지 않겠어? 엄마는 밥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들이 마냥 재미있어서 하는 줄 알아?"
"그래도 엄마는 엄마쟎아요. 엄마들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죠. 엄마들은 원래 그런거쟎아요. 그리고 저희들을 낳기로 결정을 한 것도 엄마구요. 그러니 저희들을 돌보는 일은 엄마의 의무이죠.."
"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이성을 잃지는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말 대꾸를 해 대는 녀석들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웠다...다행히도..아니었으면 보나마나 흥분된 나의 큰 소리가 천정을 뚫었을텐데.. "얘들아, 너희 말이 맞다. 엄마가 해야 할 일들이 있고, 아빠, 그리고 너희들의 일이 따로 있긴 하지..하지만, 함께 해야하는 일들이 있고, 서로의 의무가 부담스러우면 도와야 하는게 가족 아니겠니?" 이성을 잃지 않고, 부드러운 눈길로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내 목소리의 톤에 아이들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먼저 은행으로 가서, 기쁨이가 1불짜리 동전을 바꿔다 주었다. 그 다음 슈퍼마켓에 가서 빈 병을 돈으로 바꾸고 나서, 우리는 그 돈으로 쇼핑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래서 간 곳이 Dollar Giant. 여기에는 모든 물건이 1불 이하이다. 거기에는 없는 것이 없는 만물상. 선생님들의 파업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에 나온 부모들도 꽤 많았다. 적은 돈으로 아이들과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푸짐하게 한 봉지 사 들고 나와도 부담이 없는 곳이 바로 거기다. 나도 거기서 설거지용 수세미와 SOS를 한 통 샀다. 아이들도 두 개씩 자신들이 원하는 장난감을 골라서 마음이 흡족해져서 나왔다. 적은 돈을 쓰고도 아이들한테 "엄마, 고맙습니다."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Dollar Giant 가게가 참 고마왔다.
도서관에 일단 발을 들이기만 하면, 최소한 한 시간은 확실히 때울 수 있다.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을 반납하고, 아이들과 나는 각자 찾는 책을 따라서 흩어졌다. 2층 어린이 도서가 있는 곳에는 온 가족-모두 합해서 최소한 여섯 명은 되어 보이는 한 가족이 커다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귀에 익숙한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한 눈에 최근에 이민 오신 가족이라는 것을 느꼈다. 왠지 흐뭇했다.
각자 원하는 책을 한 두 권씩 빌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쯤 해서 다시 배가 고파진 아이들을 위해, 맛탕을 만들었다. 어제 사 온 고구마를 잘라서 기름에 튀긴 후에 엿물을 흠뻑 적시면 맛있는 고구마탕이 된다. 오랜만에 해 주었더니 너무 맛있다면서 먹어 주었다. 그리고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할 때 즈음에 김치를 송송 썰어서 부침가루에 고추장을 풀어 넣고 뜨끈한 김치부침개를 부쳐 주었더니 게눈 감추듯이 몇 장이 금새 없어진다.
아이들이 새로 빌려온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서, 밀린 빨래를 네 통이나 했다. 빨래가 마르는 동안 오전에 사 온 풋배추를 넣어서 사골우거지국을 만들었다. 저녁까지 흡족하게 마친 가족들은 모두 만족스럽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낸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감을 오늘 새로 산 분홍색 수세미로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닦아내는 내 마음이 그릇들처럼 같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늘 초록색과 노란색이 같이 있는 수세미를 쓰다가, 처음으로 분홍색을 샀는데, 이 분홍색 수세미가 어쩜 이렇게도 사랑스럽고 처음부터 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유난히 길었던 날. 하루 종일 바쁜 중에도 비가 오기 때문에 팽창되어진 머릿 속의 기억과 생각들로 더 분주했던 날이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며, 함께 해 주신 그 분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나도 내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어본다.
October 12, 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