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 수퍼우먼은 없다

수퍼우먼은 없다(나는 수퍼우먼이 될 수 없다라고 그 적용범위를 좁혀야 할까요? 정말 수퍼우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최근에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난 2년간은 일종의 실험 기간이었습니다. 과연 내가 '전업주부'와 '수퍼우먼' 사이의 줄다리기에서 어떤 쪽으로 승부를 낼 수 있을까. 나름대로 수퍼우먼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었습니다.

그 전에는 아이들 키우는 일에 푹 빠져서, 그 일이 즐거운 일인지 보람된 일인지 중요한 일인지도 파악이 안 된채, 그저 막연히 전업주부로서 사는 것만이 내 아이에게 최대한의 사랑을 표시하는 방법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아침도 챙겨 먹고, 자신들의 하루 일과를 스스로 조절할 정도로 제법 크자, 저에게도 조금씩 제 자신에게 쏟을만한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어떻게 그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잘 사용하는 것인가를 연구하다가 통역사 자격증을 따기위한 과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 통역기초 과정을 끝내자마자 정부 보건부에서 뽑는 프리랜서 자격의 의료통역사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기초과정은 크게 어려운 것이 없었으나,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공부했고, 취업이 되어서도 계속적인 노력을 해야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내 스스로 봉급수표를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보고 또 보고, 볼 때마다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희열을 맛 보면서 내 자신의 '존재감'을 봉급수표의 액수만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일이 없는 날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이 얼마나 내 인생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자료인지를 느끼고 고마와 하면서,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머리 속에서 이미 다 묻혀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지식들을 하나씩 되살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때로 일이 있어서, 아이들이 집 문을 잠그고 학교에 가거나, 집에 돌아와서 잠긴 문을 열고 들어와야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집에 들어오면 가족들의 끼니를 챙겨주느라 분주해 지고, 저녁 준비가 되는 대로 퇴근하는 남편과 바톤 터치를 하고는 곧바로 학교로 향합니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 돌아오면, 아직 잠 자리에 들지 않은 아이들을 채근 해 자도록 하고, 퇴근 후 피곤으로 소파에 파묻혀 있는 남편이 미처 설거지까지 신경을 못 쓰는 날은 설거지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 식사와 가족들 도시락 준비를 합니다. 그러고는 그 날 저녁 때 들었던 무거운 학과 수업 때문에 복습에 대해 잔뜩 부담만 짊어진 채 저도 피곤한 몸을 누입니다. 머리 속은 내일 장에 가서 살 물건, 오늘 배운 내용에 대한 생각, 아이가 부탁한 일, 산더미 같은 빨래 등등으로 꽉 차서 머리가 답답한 것인지, 가슴이 답답한 것인지를 궁금해 하며 잠들게 됩니다.

이제 아이들은 5학년 7학년.

기쁨이는 만 13세가 되어, 본격적으로 '사춘기'가 되었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실제로 많은 혼란을 겪는 듯 싶습니다. 사고 싶은 것도 많고, 자신의 신체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점점 늘어나고, 아무리 매만져도 뭔가 심각하게 이상해 보이는 머리와, 아무리 열심히 씻어내도 아직도 코에 남아있는 듯한 꼭지가 검은 여드름 신호. 밤에 일찍 잠에 들기가 힘들고, 아침에는 제 시간에 일어나기가 더 힘들고. 생리날짜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말할 수 없는 피곤에 쌓이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숙제도 끝내기가 힘든 적이 많아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낮에 시간이 있어서 부엌일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 학교의 카운슬러가 전화를 했습니다. 기쁨이가 카운슬러 서비스를 요청했고,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있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 나이에는 부모 외에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동의서에 서명을 해서 보내겠노라고 대답을 하고 끊었습니다. 기쁨이가 엄마한테 얘기하기 힘든 문제가 생긴 것일까? 나중에 기쁨이에게 카운슬러를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엄마는 너무 바쁘고 매일 피곤해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엄마를 괴롭힐 수가 없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 나이에 커다란 문제일 수 있는 친구관계에 대한 고민 때문에 상담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그런 서비스가 학교에 있어서 기쁨이가 정신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졌지만, 다른 편으로는 가장 가까워야할 엄마의 도움을 원할 때 받을 수 없었던 기쁨이에게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자랑이는 학교에서 커다란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늘 저를 찾아와서 어떻게 진행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을, 저도 바쁘고 피곤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도 가서 책을 찾아보고, 복사며, 보고서 작성 및 프리젠테이션 준비 등을 함께 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도움을 못 주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하루를 잡아 전시회에 전시할 커다란 그림을 완성하는 일을 하나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자랑이는 덩치만 큰 어린 아이라서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고, 아빠와의 관계가 좋은 덕에 큰 문제는 없이 엄마의 부재를 이겨내 주었습니다.

지난 5월이 되어서야 늘 저에게 두통과 부담을 안겨주던 법정통역 코스가 끝나고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그 공부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못했으므로, 그 코스가 끝나는 대로 아이들에게 소홀히 했던 부분을 채우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지난 한 달 반 동안의 노력 끝에 이제 저희 가정은 다시 정상적인 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기쁨이가 자신이 필요한 물건들을 대부분 확보했습니다. 엄마와 함께 쇼핑을 다니며 사야할 옷이나 신발들을 샀고, 자잘한 소지품들도 충족이 될 정도로 구입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학교 친구 Clarissa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Clarissa네 부모님들은 걔를 아직도 아기 취급을 해요. 13살인데도 9살짜리처럼 대한대요. 그런 걸 볼 때 나는 참 행복한 거예요. 우리집은 저를 존중해 주니까요.'라면서 만족하고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커다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기쁨이가 7학년 졸업을 하고 받아온 성적표는 엄마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어 주는 증거물입니다. 거기에는 A와 B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고(올A를 받아야만 잘 하는 것으로 쳐 주는 저에게 그 비율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시겠지요), 지각과 결석의 수가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그 성적표는,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과 배려와 안정감을 제공해 주지 못한 제 자신의 엄마노릇을 그대로 숫자와 알파벳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좇아야 할 두 마리 토끼가 있습니다. 커리어와 자녀양육. 이 두 토끼를 좇는 데 꼭 필요한 필수요소를 '충분한 시간과 기술'이라고 봤을 때,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두는가에 따라 그 토끼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아이들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고 있으며, 엄마가 커리어쪽 토끼를 잡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제 일에 전념을 하고 성공적인 사회인이 되어 아이들에게 돌아왔을 때는 아이들이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겠지요.

지난 2년간의 소중한 경험을 통해, 내 몸이 하나이고, 아이들의 엄마가 한 명인 한은, 나는 도저히 수퍼우먼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집토끼의 다이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