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아침..2004/07/20,화 2004-07-24 01:38
1364
http://www.suksuk.co.kr/momboard/BFA_044/175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네이버밴드 페이스북 트위터
쑥쑥닷컴 - 파일 다운로드

파일을 다운로드 합니다.

댓글 남기기
그 날 아침은 이러했다

은창이 유치원 여름방학 직전에 있는 수영주간의 첫날이었다. 은창이는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에 수영을 한다고 신나있었고 꾸물거리는 녀석을 깨우기에 가장 효과적인 멘트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이은창..일어나라..너 오늘 수영 안가니? 이러다가 늦어서 수영 못하면 어떻하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아이 곁에 살그머니 누웠다. 은창이는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와 눈꼽이 덕지덕지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말했다.
"엄마....나를 꼭 껴안아줘..그러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애.."
원래 그 <꼭 껴안는 것>은 <꽉 무는 것>과 더불어 내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여 아이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 전에 늘 먼저 내 넘치는 사랑의 표현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날 아침은 은창이가 먼저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까슬까슬한 삼베 요에서 꼼지락거리는 은창이의 몸을 안아주는 것은 내게 너무 기쁜 일이었다. 시원한 사각 팬티에 작년부터 입어 한껏 부드러워진 런닝셔츠의 감촉, 녀석의 보드라운 피부...
"엄마..엄마가 안아주니까 참 기분이 좋아..."
"너는 엄마 보들이야.."
<보들이>는 은창이의 곰인형이다. 털이 워낙 부드러워 할머니가 선물한 이 곰인형에게 은창이는 단박에 보들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은창아..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묻는 나의 일상적인 질문이다. 왜 이런 재미없는 질문을 반복하는 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음..달리기 선수.."
아직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대답..조금 놀랬다.
"어? 왜 또 갑자기 달리기 선수야? 그건 또 언제쯤 바뀌나? ㅎㅎ"
"아니야 이건 아마 안 바뀔거야...."
"그래? 왜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은데..."
"어...달리기 일등해서 금다발, 은다발 받고 싶어...아참 동다발도 있지..."
"아..금메달^^;;"
"맞다..금메달..."
"그럼 우리 미리 인터뷰 연습 좀 할까?"
"어떻게?"
"...네 이은창 선수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이 기쁜 소식을 누구와 나누고 싶습니까"
"...엄마요..."
"아니..좀더 어른스럽게 말해야지.."
"네 저희 어머니랑 나누고 싶습니다..."

이렇게 킬킬거리면서 노니닥거리다가 후다닥 일어나서 유치원에 갈 준비를 했다. 늘 그렇듯이 밥상을 앞에 두고 나는 신문을 펼쳤다. 남편은 그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참 고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맞닥드린 뉴스였다..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어쩌구저쩌구...

기사를 보는 내내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또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다. 나의 놀라는 모습에 은창이는 물었다.
"엄마..왜 그래? 밥 먹어요..."
"어..그래..."
문뜩 올려다 본 은창이..이유는 거기 있었다.

그 사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엄마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을 텐데....우리의 아침처럼 마냥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 텐데...왜 그렇게 되었을까...태어났을 때는 똑같은 출발이었을 텐데...우리 은창이처럼 해맑은 얼굴이었을 텐데..엄마한테 사랑받는 예쁜 아들이었을 텐데...
피해자 가족이 들으면 노발대발 말도 안되는 소리이겠지만 나는 남들보다 하루 늦게 접한 그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면서 문뜩 아침나절 그 정겹고 행복했던 순간이 왜 그에게 미안한 행동처럼 느껴졌을까....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처럼 느껴졌을까...

그리고 오늘 아침에 신문을 들여다 보았다. 칼럼에 한 정신과 의사가 쓴 그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그의 불행했던 어린시절과 맞물려 시작된 사회생활과 그로 인해 왜곡된 사회인식,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느낀 외로움과 분노...

물론 사람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다고 그 사람처럼 그렇게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는 식의 극단적 일탈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이런 끔찍한 행위에 내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 것일까... 그의 소식을 접한 그 날 아침이 괜히 미안스레 느껴진 것은 단지 소심한 아줌마의 감상일 뿐일까...

얼마전에 숙제로 서평을 하나 썼다. 인간은 사회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에 오롯이 나만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이타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안에서 노력하고 살 때 그것이 건강한 삶이라는 논리가 어린이용 책을 읽고 쓴 서평의 내용이었다. 그 책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의 단편을 묶어 놓은 것인데 다소 억지스럽고 그야말로 소설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문제-가난,실직,장애 등등-에 대해 논의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그런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한 어린이일 경우 어떤 경로든지 간에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기에 말이다.

그런 책을 읽었고 유영철 사건이 있었고...그래서 나는 순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잠깐 일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남한테 피해 안주면 되지...오지랖 넓게 쓸데없는 생각은 필요없어..나만 잘 살면 되지...
이건 아니야...하는 생각이 다른 때가 아니고 왜 이때 생각이 났을까...그 사람의 죄가 왜 내 죄인양 부끄럽고 힘들까....
여전히 내 새끼들 끼고 지나가는 길에 개똥이라도 밟을라 조심스런 발걸음을 옮길거면서, 술취한 노인네를 비껴갈거면서, 휘청이는 장애인을 어쩌지를 못할 거면서, 너무 자주라는 이유로 구걸을 지날칠거면서, 적십자회비도 빼먹으면서...

마이 페이지 > 스크랩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소중한 글에 감사 댓글 남겨주세요.

     
로그인 후 덧글을 남겨주세요

처음시작하는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