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삶 그리고 짧은 사랑 이야기
≪분홍바늘꽃≫은 열다섯 살 소년 빌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전쟁과 사랑 이야기이다.
빌은 전쟁이 아니었으면 줄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아이는 나치의 런던 대공습 한가운데 외톨이였고 둘 다 도망 중이었다. 피난처에서 돌아온 빌의 주머니엔 달랑 6펜스만 남아 있었고, 캐나다로 가는 피난선을 탔다가 되돌아온 줄리는 길 잃은 강아지처럼 어찌할 줄을 몰랐다. 죽음과 파멸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끔찍한 파괴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열다섯 살 두 아이는 런던을 구경 다니고, 공습이 있는 밤에는 땅속 지하철역에 숨고, 낮에는 노점에서 돈을 벌며 기쁨을 함께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따뜻한 은신처를 가꾸어 나가며 서로를 의지하고 지켜준다. 하지만 전쟁의 손길은 둘의 관계 역시 가만두지 않는다. 빌은 공습에 파묻힌 줄리를 구해 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전쟁 이야기라기보다는 사랑 이야기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는 짧은 순간 피었다 져 버린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 참혹한 전쟁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40년대의 전쟁과 소박하고 순수한 당시 10대 청소년의 사랑을 투박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다른 청소년 문학 작품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준다. 이 책과 같은 배경의 영화인 <금지된 장난>(프랑스, 1952년작)이나 같은 시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마이 러브>(스페인, 2002년작) 같은, 전쟁과 동심의 사랑이 대비되는 영화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청소년을 위한 사실주의 전쟁 문학 작품
청소년 역사 소설 작가로 다수의 상을 받은 작가 질 페이턴 월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런던과 소년 소녀의 사랑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다. 리얼리즘의 거장이란 명색을 증명하듯, 작가는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불안정한 15세 소년의 눈으로 런던 대공습 당시의 상황을 다큐멘터리처럼 세밀하게 그려내는데, 거기에는 작가 자신이 어린 나이에 겪은 런던 대공습 장면이 그대로 녹아 있다. 청소년을 위한 전쟁 문학 작품들은 전쟁의 비극성과 반전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10대 소년의 눈에 비친 전쟁을 어떤 논리나 주장도 내세우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방법을 통해 이야기한다. 공습, 사이렌, 등화관제, 대피, 음식 배급, 철모를 쓰는 간호원, ‘히틀러에게 지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며 꿋꿋하게 일상을 유지해 나갔던 런던 사람들의 삶 등 구체적인 역사 사실들의 전개는 마치 전쟁을 함께 겪는 듯한 착각을 주기까지 한다. 10대 주인공이 느끼는 솔직한 심정과 어리숙한 생존 방식, 계급이 다른 소녀와의 사랑 역시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지며 의도적으로 꾸며 나가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한 장의 거친 흑백 사진이 강렬한 인상을 주듯, 그 사실들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와 말하지 않은 감정들은 훨씬 깊은 감동을 안겨 주며, ‘전쟁과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든다. 청소년을 위한 사실주의 전쟁 문학 작품으로 권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