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하다보면 여러 모양의 장승들을 많이 만나곤 한다. 여주의 목아박물관 입구에 옹기종기 서 있던 장승과 솟대들, 무안의 연꽃방죽으로 가는 길가에 늘어선 현대판 장승들, 공주산림박물관 입구에 모여있던 장승과 솟대들...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옛날에는 마을 입구마다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장승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에야 이렇게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장식물로나 만날 수 있으니, 어쩌면 이들도 '기차 타고 쿨쿨, 버스 타고 털털, 다시 타박타박 반나절' 가야하는 장승마을에서 실려온 장승들인지도 모르겠다. 장승들이 모여있는 곳에 갈 때마다, 익살넘치는 표정들 때문인지 많은 이야기들이 샘솟듯 솟아날 것 같은 생각에 발길이 절로 멈추어진다. 자기네들끼리 뭔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주고받는 듯도 하고 혹은 길가는 나그네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내 말좀 들어보소'하고 이야기를 건네려는 것도 같고...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없고 사람살이가 천태만상이라고 하지만 어디 장승들에 비길쏘냐...장승들의 그 무궁무진한 표정은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거침없이 상상력의 보따리를 풀게 한다. 바로 그 보따리 중의 하나가 이 책이다. 책을 처음 꺼냈을 때, 아이가 깔깔 웃는다. 좌우로 뒤바뀐 제목글씨 때문이다. 책을 안고 거울앞에 마주섰을 때야 비로소 제목이 잘 보인다. "으악, 도깨비다!" 누가 외치는 비명일까. 뻐덩니와 멋쟁이,퉁눈이,키다리,짱구,주먹코.....생김새와 개성 대로 이름붙여진 장승들은 바람만 아는 깊은 산골에 있는 장승마을에서 살고 있다. 낮이면 땅에 붙박혀 서로 말씨름을 하며 지루함을 견디고 밤이 되면 팔다리가 생겨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장승들이다. 하지만 날이 밝기 전에 제자리로 오지 않으면 영원히 움직일 수 없다. 보름달이 훤하던 어느날 밤, 장승들은 옹기나르기 시합을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며 논다. 그런데, 그만 왕자병 멋쟁이가 너무 멀리 숨었다가 날이 밝는 줄도 모르고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만다. 물가에 붙박혀버린 멋쟁이...다시는 움직일 수가 없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람들에게 붙잡혀가기까지 한다. 멋쟁이의 소식을 들은 장승들은 멋쟁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는게 상책이라고 수군거린다. 하지만 친구를 그냥 놔둘수도 없고 정들었던 장승마을을 버리고 떠나는건 더더욱 비겁한 일이다. 결국 힘을 합쳐서 멋쟁이도 구하고 장승마을도 지킬 수 있었던 장승친구들은, 아마 지금까지도 기차타고 쿨쿨, 버스타고 털털, 다시 타박타박 반나절 가야하는 깊은 산골의 장승마을에서 낮이면 서로 잘났다고 말씨름을 하고 밤이면 숨바꼭질을 하며 즐겁게 놀고 있을 것이다. 단, 너무 멀리 숨는 일은 다시 없겠지... 장승마을의 재미난 이야기라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그려진 환경문제들이 어느 한 구석 가슴을 찔리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에 어리는 두 줄기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그림 한켠에 버려진 빈캔, 그리고 장승을 실어가는 '쓰리랑갈비'트럭으로 대표되는 사람의 흔적이 그것이다....예전에는 사람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하는 웅숭깊은 공간이 많았다. 그곳에서 신화와 이야기가 태어나고 상상의 마법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제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은 없다. 오죽하면, 까마득한 장승마을에까지 쓰리랑갈비의 트럭이 부릉부릉 달렸을까...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좀 '자연적'이다 싶은 곳이 있으면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뒤바꿔 놓는 것이 사람이 부리는 작태다. 그리고는 그 인공적인 시설물 앞에 자연흉내를 낸답시고 오래된 물건이나 돌, 나무들로 슬쩍 가리워서는 '문화'라 이름붙인다. 그리하여, 자기 짓이 못내 찔리는 사람들은 결국, 장승을 보고 "으악, 도깨비다!'하고 소리치며 줄행랑치기에 바쁘다. 장승을 도깨비라고 두려워 하는 어른들은 장승마을에 다시는 갈 수 없을 것이다. 처음 그림책을 본 순간, 마치 우툴두툴한 장승의 질감이 그대로 만져질 듯한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참을 쓰다듬어 보았다. 유애로의 그림에서 마음에 드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들꽃이 흔하게 나온다는 것인데 역시 장승마을에도 하얗고 노랗고 보라색인 들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장승마을이 있는 숲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그린 짙은 초록과 푸른색의 조화도 멋지다. 내용과 그림도 훌륭하지만 종이의 재질이나 인쇄도 고급스러워서 꼭 갖고싶은 욕심이 들게하는 그림책. 게다가 저마다 개성을 갖춘 장승들은 보면 볼수록 정이가는 캐릭터들이다. *장승에 관한 우리문화그림책: <장승>(솔거나라 시리즈: 주강현 글/이규경 그림/보림)

저자 손정원
어린이책을 기획 편집하고 있다. 어린이 잡지 「자연과 어린이」를 창간했고, \'피카소 동화나라\', \'꼬맹이 자연방\' 과 같은 시리즈를 기획했다. 지은 책으로 <으악, 도깨비다!> 등이 있다.

그림 유애로
1996년 창작 그림책 <갯벌이 좋아요>로 어린이 문화 대상 미술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쇠똥구리구리>, <갯벌이 좋아요>, <쪽빛을 찾아서>, <반짝반짝 반디각시>등이 있다.